[人사이드 人터뷰] 밀리언셀러 여행에세이 작가 겸 시인 이병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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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절반은 낯선 곳에서…이병률 시인(49)은 여행에세이 분야의 밀리언셀러 작가다. 그가 지금까지 내놓은 세 권의 여행에세이집 중 《끌림》은 누적 판매량 50만부, 《바람이 분다 사람이 좋다》는 43만부, 《내 옆에 있는 사람》은 13만부를 판매해 모두 합치면 106만부 이상을 팔았다. 소설에서는 100만부를 넘는 작품이 여럿 있지만 여행에세이 분야에서 100만부를 넘긴 작가는 이 시인이 유일하다. 무엇보다 이 시인은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여행서의 지형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이 시인의 내면 풍경을 담은 대화집 《안으로 멀리뛰기》(북노마드)를 냈다.
여행하며 발견하는 삶의 의외성, 그 두근거림에 또 떠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사춘기
넉넉하지 않은 살림, 집안 반대로 꿈 접어
"좋은 시인돼라" 선생님 격려에 문학수업
신춘문예 등단 "시인으로 불러주세요"
라디오 작가 거치며 독자와 소통법 터득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풀어내는 힘 길러
티베트·마추픽추 가장 강렬한 '끌림'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내 집 같은 일상 체험
수시로 항공권 검색하며 '떠날 궁리' 하죠
여행지에 대한 소개와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의 여행에세이라면 이 시인은 독자와 교감하고 새로운 감성을 통해 여행지의 풍경을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 놓는다. 독자들이 이 시인의 책에 열광하는 이유다.한 도시에서 오래 머무는 여행 좋아해
지난 18일 서울 서교동 홍대 카페에서 만난 이 시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아줬다. 이 시인이 지금까지 여행을 다녀온 지역은 모두 105개국. 거쳐 간 도시까지 따지면 그보다 더 많겠지만 실상 숫자를 헤아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손을 내젓는다.
“저는 여행을 갈 때 잠깐 스치면서 지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행지의 아파트를 빌려주는 숙박 사이트를 뒤져서 예약하고 아주 오랫동안 묵습니다. 관광지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마치 내 집처럼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창가를 통해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을 담아 놓습니다. 느슨한 일상에서 내 글이 톡톡 발아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말하자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 저를 유배시켰다고나 할까요.”대개 한 나라를 한두 번 여행하면 또 다른 여행지를 찾아 영토를 넓히는 것이 일반적인 여행작가의 속성인 반면 그는 한 도시를 스무 번도 넘게 다녀오기도 한다. 한 도시나 한 국가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관찰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인은 일반적인 여행지보다 중국 티베트나 페루 마추픽추 같은 곳이 가장 강렬하게 끌렸다고 고백했다.
“티베트나 페루 같은 곳은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함과 야생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전형적인 유럽 국가는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그렇게 가슴에 남지 않았죠. 오히려 동유럽을 더 좋아합니다. 제가 소년기 시절 보던 풍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거든요. 회벽의 색깔이나 비만 오면 흙이 올라와 진흙 바닥으로 변하는 풍경, 녹슨 철장 등이 제 정서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라디오 작가 거치며 독자와의 소통법 터득
여행법이 다르다 보니 일반적인 풍경도 시인의 글로 녹이고 나면 전혀 다른 풍경으로 살아난다. 예를 들어 전남 진도에 있는 관매도(觀梅島)를 이렇게 묘사한다.“관매도에 두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일 때문에 마땅한 장소를 찾으러 간 길이었는데, 좋아서 하루를 더 묵었고 그다음 꼭 1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1년 만이었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인 섬. 치킨과 피자와 자장면이 없는 곳. 어린 친구에게 관매도는 그런 곳이었지만 나에게 관매도는 맑은 바다와 부드러운 햇살과 해송림을 통과한 솔바람에 대한 기억으로 1년 내내 두근거리는 곳이다. 그곳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도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펄럭펄럭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처럼.”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보게 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은 라디오 작가 시절 습득했다. ‘FM음악도시’ ‘라디오천국’ 등의 메인 작가였던 이 시인은 라디오 작가 시절 독자들이 어떤 말에 공감하고 힘을 얻는지 알았다고 고백한다.
“라디오 작가를 잘하려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일상의 사소한 것을 진부하지 않게 풀어줘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방송은 에세이풍의 글을 훈련하는 데 최적의 장소인 셈이죠. 처음에는 제가 쓰는 시와 방송 원고가 충돌할 때가 많았지만 나중에는 그 두 개가 잘 융화한 것 같아요.”
방송 작가, 여행에세이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시인은 중앙문단에서 꽤 인정받는 중견 시인이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돼 등단했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등 다수의 시집을 냈고 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바닥 없는 ‘슬픔’과 깊고 조용한 ‘응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생의 안팎에 새겨진 특유의 ‘절박함’을 담백하게 그려내는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춘기 방황, 글로 풀며 문학과 만나
이 시인은 여행 작가나 여행에세이스트라는 호칭보다 ‘시인’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한다. “여행이 시보다는 좀 작아요. 시가 큰 집이라면 여행은 작은 집이에요. 시가 본가(本家)라면 여행은 세컨드 하우스죠. 여행을 가질래, 시를 가질래 하면 당연히 시를 가지겠지만 여행이 없으면 물이 확 빠져버리고 핏기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시와 여행은 (제게)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인의 가슴에 시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사춘기의 열병을 앓던 무렵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춘기의 반항기를 분출해야 하는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유교적인 아버지는 그의 반항을 이해하지 않았다. 공부는 하기 싫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막연한 대상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일뿐이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집에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구멍가게로 가족이 연명하던 터라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어요. 아버지는 제가 법대에 가서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제 이름을 잡을 병(秉)자에 법률 률(律)로 지은 것도 그 때문이죠. 그런데 중학교 때 선생님이 율자를 운율(韻律)할 때 율자인 법칙 율(律)로 읽고 저보고 좋은 시인이 되라고 격려했죠. 그게 작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서울예술대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받고 시인이 되고 유명작가가 됐지만 그는 늘 외롭고 쓸쓸하다고 했다. 결혼을 안 해서도 아니고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해서도 아니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더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에 놓여서 자극을 받고 살아갈 힘을 얻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하이대 구내식당 보조’ 체험 여행 떠날 겁니다”
“수시로 항공권을 검색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늘 여행을 생각합니다. 눈이 오면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로 떠날 궁리를 하고 때로는 예술가들이 용광로처럼 자기를 보이기 위해 애쓰는 미국 뉴욕으로 떠나곤 합니다.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도 따끔거리는 충격과 자극을 받습니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요.”
때로는 엉뚱한 여행 계획을 잡아보기도 한다. 기차표 네 장을 사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세 사람에게 나눠주고 낯선 사람과 같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번에는 더 색다른 체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주방장 보조로 일해보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소원을 이뤘습니다. 중국 상하이대에 아는 사람이 연결해줘 구내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려고 합니다. 10월 초에 출국해 한동안 정착할 생각입니다. 기름을 뒤집어쓰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겠죠. 이런 삶의 의외성이 저를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런 것이 진짜 여행 아닐까요?”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