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예술의전당 설립 28년 만에 처음 연임한 고학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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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밥먹듯 문화와 가까워지게 '공연 문턱' 없애겠다"‘왜 오페라를 보러 갈 때마다 아는 사람들뿐일까.’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69)은 취임 6개월 만이던 2013년 9월,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연장을 찾는 사람은 문화계 인사나 오페라 애호가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오페라는 어렵거나 재미없다고 지레짐작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벽을 허물어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섬마을 등 문화 소외지역에 오페라·발레 영상 무료 제공
나이지리아 사람들 가곡 듣고 눈물…'공연 한류' 새 가능성
음악분수 옆에 푸드트럭·아이스링크 만들어 문화수요 확충
군인 대상 문화휴가제도 추진…30주년 땐 '예술가의 숲' 조성
2개월 뒤 예술의전당은 ‘삭 온 스크린(SAC On Screen)’ 사업을 시작했다. 오페라, 발레 등 공연을 녹화해 영상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섬마을에서도, 외국에서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공연을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1년쯤 뒤 고 사장은 울릉도의 한 초등학생이 보낸 손편지 한 통을 받았다. 소녀는 군민회관에서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발레를 처음 봤어요. 저도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 한 소녀에게 꿈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이 사업은 의미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지난 3월 고 사장은 예술 대중화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연임에 성공했다. 예술의전당 설립 28년 만에 첫 연임이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그를 만났다.
▷연임의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좋은 선례를 남기게 돼서 기쁩니다. 제가 14대 사장입니다. 28년 동안 14번 바뀌었단 얘기입니다. 한 사람이 2년도 못 한 거죠. 그 짧은 기간에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문화융성이나 문화격차 해소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사업 추진은 불가능했죠. 이제 첫걸음을 뗐습니다. 다른 기관들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어떤 일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겁니까.
“소수만 즐기는 예술의 문턱을 모두 없애는 것입니다. 소외계층, 외국인, 동네 주민 등이 다 함께 즐기는 공연문화를 조성하고 싶어요. 삭 온 스크린 사업도 처음에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공연업계, 언론 모두 ‘영상으로 공짜로 보여주면 누가 공연을 보러 오겠느냐’고 했죠.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고 한 말입니다.”
▷효과는 어떻습니까.“장기적으로 ‘문화 인구’ ‘문화 수요’를 만드는 데 큰 효과가 있습니다. 10~30대 젊은 층 가운데 뮤지컬은 꽤 봤어도 오페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사람이 많더군요. 오페라 한 편 제작하는 데 10억원 정도 듭니다.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요. 그런데 관객은 많아야 5000명입니다. 젊을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연을 나중에 나이가 들고 돈을 번다고 보겠습니까. 문턱을 없애 일상에서 예술을 가까이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문화 인구를 키워야 합니다. 삭 온 스크린 사업이 출발선을 잘 끊어줬다고 생각해요.”
▷해외 반응은 어떤가요.
“해외 한국문화원을 통해 25회 상영했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반응이 정말 좋습니다. 동포뿐만 아니라 현지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우리 공연에 관심을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국내에서는 가곡이 인기가 시들하잖아요. 나이지리아에서 영어로 자막을 넣은 ‘가곡의 밤’ 공연 영상을 보여줬더니 젊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듣더라고요.”▷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가곡에는 전쟁, 가난 등에 대한 한과 때로는 그리움의 정서가 묻어있지 않습니까. 우리 젊은이들은 이걸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현재 아프리카의 정치·경제 상황과는 딱 맞아 떨어지죠. 이게 그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 같아요. 우리만의 콘텐츠라고 생각했던 것이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었어요. 이런 게 ‘공연 한류’ 아니겠습니까.”
▷군인을 위한 제도 마련도 추진한다고 들었습니다.
“군인 대상 문화휴가제도를 국방부에 공식 건의할 예정입니다. 1년에 네 번 정도 문화휴가를 주고 그 휴가증을 가져오면 관람료를 40~50% 할인해 주는 겁니다. 60만명 이상의 군인이 긴 시간 문화와 담을 쌓고 지내고 있습니다. 문화생활을 못하면 정신이 가난해지죠. 그래서 부작용이 많이 생기는지도 몰라요. ‘문화가 있는 군대생활’을 제공해야 합니다. 공연업계에도 잠재 고객을 미리 확보하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힘들 때 공연을 보고 큰 위로를 받으면 제대하고 나서도 그때가 생각나서 보러 오지 않겠습니까.”
▷예술의전당 공간에도 큰 변화가 생겼던데요.
“이것도 문턱 없애기의 일환입니다. 예술의전당 안 음악분수 옆에 아이스링크를 조성하고 푸드트럭도 들였죠. 여기서 버스킹공연(거리공연)도 합니다. 예술의전당 하면 ‘비싼 공연 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동네 주민이나 시민들이 편히 들를 수 있어야 하는데 문턱조차 쉽게 넘지 못하는 게 말이 됩니까. 맛있는 것 사먹으면서 공짜로 가곡이나 동요 공연을 보면 한결 편하게 느껴질 것 같았어요. 겨울에는 아이스링크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니 훨씬 정감도 있습니다. 예술의전당을 ‘서울 시민의 뒷마당’으로 가꿀 겁니다.”
▷문화 발전을 위해선 콘텐츠의 질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요.
“저렴하면서도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주는 게 관건입니다. 그동안 예술의전당은 대관에 많이 치우쳤는데 자체 콘텐츠 제작 비중을 현재 20%에서 30%로 늘릴 계획입니다. 공익성을 고려하고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거예요. 이를 위해선 기업의 적극적인 문화 후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부 예산에 의존하면 예술가들이 눈치 보기 바빠져요. 예술이 독립적으로 발전하기 어려워지죠. 그래서 민간 투자가 필수입니다. 최근에는 한세실업 등 중소기업의 참여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조금씩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업의 참여와 후원을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문화 기부는 돈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세요. 미국의 수많은 극장은 후원기업 이름으로 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업은 상품만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를 얻죠. 예술의전당도 후원 기업들에 그런 이름을 줍니다. IBK챔버홀, CJ토월극장 등이 있습니다. 한화는 교향악축제를 후원하며 ‘한화교향악축제’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효과는 엄청납니다. 대중의 머릿속에 그들의 이름과 이미지는 오랫동안 남을 것입니다.”
▷2018년이면 설립 30주년입니다.
“30년을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했던 공연을 한 무대에서 모두 조망하고 예술의전당에서 데뷔한 예술가도 부르고, 초연 작품도 다시 무대에 올릴 겁니다. ‘예술가의 숲’을 조성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음악분수 뒤에 작은 동산이 있습니다. 이곳을 산책하면서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삶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2년 반 더 예술의전당을 이끌게 됐는데 어떤 꿈이 있습니까.
“한 외국인이 제게 ‘한국에는 한 달에 한 번만 문화가 있느냐’고 묻더군요.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을 두고 한 말이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굳이 날짜를 지정해서 문화를 즐기자고 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사회가 병들어갈 때 가장 좋은 처방이 뭘까요. 문화입니다. 하루 세 끼를 먹듯 마음의 양식인 문화도 늘 옆에 있어야 합니다. 문화생활을 너무 많이 해서 한 달에 하루 ‘문화가 없는 날’을 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오는 날을 오게 하는 게 제 꿈입니다.”
'PD의 눈' 공연에 접목…문화계 새 바람 일으켜
공연의 감동을 고스란히 고화질 카메라에 담겠다는 생각.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이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그의 이력 덕분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고 사장의 첫 직장은 동양방송(TBC)이었다. 1970~1977년 이곳에서 PD로 일하며 드라마, 교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후 제일기획 Q채널 제작1부 국장,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을 거쳤다.이런 경력이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공연계 출신이 아니라 방송계 인사가 예술의전당 사장을 맡는 데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PD의 눈’을 공연에 접목했다. 고 사장은 “공연장의 가장 좋은 자리에서도 볼 수 없는 예술가들의 표정 하나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있겠느냐”며 웃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