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운명 법원 손에] 빚 갚을 돈 없는데도…"설마 망하겠나" 독이 된 낙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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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말렸던 한진해운 구조조정 5개월한진해운이 31일 끝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날 오전 열린 한진해운 이사회는 내내 침울했다. “채권단이 조금만 도와줬으면 살 수 있었다”는 불만도 터져나왔다고 한다. 한편에선 ‘정부가 애초에 한진해운을 지원할 의사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현대상선이 살아남은 걸 두고서 나오는 얘기다.
이동걸, 3월말 조양호 만나 "내부 보고만 믿지 말라"
회사채 만기 돌아오는데 "유동성 위기 없다" 낙관만
현대상선 협상 잘 풀리자 "우리가 법정관리 가나…"
8월말 자구안 최후통첩
협상 난항…끝내 법정관리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신청을 하기까지 지난 5개월을 되짚어본다.◆“조 회장, 내부보고 믿지 마시오”
해운업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화물 운임이 급락했기 때문이다. 2014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제수인 최은영 전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해 하반기 한진해운 부채비율은 600%를 넘었다. 정부와 채권단이 한진해운에 대책마련을 주문한 게 이 무렵이다.하지만 한진그룹 분위기는 그다지 긴박하지 않았다. 현대상선이 채권단에 자구안을 내고 해외 선주사와 용선료 인하 협상에 나선 지난 2월 말, 한진그룹 관계자는 “한진해운은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 1분기에도 흑자를 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진그룹이 나서지 않자 정부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에게 조 회장을 직접 만나라고 주문했다. 3월 말,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회동 말미에 이 회장은 “내부 임직원들이 올리는 보고를 너무 믿지 말라”고 말했다. 표정이 굳어진 조 회장은 “숙고하겠다”고 짧게 답했다.
◆“현대상선 아니라 우리가 살 것”그날 만남 뒤에도 한진그룹 내부에선 낙관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상황은 한진그룹 기대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현대상선은 3월 말 현대증권을 1조2500억원에 매각하면서 회생 기회를 잡았다. 반면 한진해운은 6월 말 만기가 돌아오는 1900억원의 회사채를 갚을 자금도 모자랐다. 결국 4월25일 한진해운은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을 신청했다.
4월26일, 정부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모두 △용선료 인하 △사채권자 설득 △채권단 채무재조정을 이뤄내지 못하면 법정관리가 불가피하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5월13일, 한진해운에 호재가 나왔다. 현대상선의 해운동맹 잔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한진해운이 독일 일본 대만 등 해운사와 제3의 글로벌 해운동맹(디 얼라이언스)을 맺기로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5월 중순 사석에서 “현 상황만 놓고 본다면 현대상선보다 한진해운이 더 어렵다”고 평가했다.
◆“산은이 좀 도와주시오”6월 들어 상황은 한진해운에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6월10일, 현대상선이 해외 선주사와의 용선료 인하협상을 타결지었다. 금융당국은 용선료 협상에서 진척이 없던 한진해운 측에 “현대상선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크 워커 변호사(미국 밀스타인 법률사무소)를 기용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거절했다.
이 무렵 한진해운 내부에 ‘이러다가 현대상선이 아니라 우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돌기 시작했다. 조 회장과 그룹 경영진은 채권단의 자금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6월 중순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이 이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권단이 한진해운에 추가 자금을 지원해줄 수 없겠소”. 김 장관의 요청에 이 회장은 “구조조정 기업에 신규자금 지원은 없다는 게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원칙”이라며 “원칙을 깰 수 없다”고 답했다.
8월22일께 이 회장과 조 회장은 비공개로 또 한 번 만났다. 하지만 양측은 견해차만 확인하고 돌아섰다. 8월25일, 기존 자구안에 1000억원을 추가한 자구안을 제출한 한진그룹은 마지막까지 채권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나섰다. 채권단회의 전날(8월29일)엔 유상증자 시기를 앞당기는 등의 추가 자구안을 냈다. 하지만 산은은 “뭐가 추가됐다는 것이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채권단은 8월30일 한진해운에 대한 신규자금 지원 중단 결정을 내렸다.
이태명/안대규/좌동욱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