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경제도 과학기술도, 창의성이 문제다

창조와 선도자 구호 무색한 과학기술전략
부족한 창의성은 우리사회 중증 질환
따라쟁이 과학 아닌 창의 연구를 해야

염한웅 < 포스텍 교수·물리학 >
이미 10년도 전이지만 큰아이가 아직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시절, 전국적으로 ‘따라쟁이 치코’라는 원숭이 인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집집이 아기가 한 말을 간이녹음기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따라쟁이가 있었다. 처음엔 재미있지만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말들을 반복하는 이 따라쟁이들은 부모들에게는 곧 짜증스러운 밉상이 됐다.

필자는 우리 경제나 과학기술계를 보면서 항상 이 따라쟁이 인형을 떠올린다.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의 기본 개념이 창조경제이고, 경제계의 화두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로 옮겨진 지 꽤 됐는데, 정부의 과학기술전략회의가 몇 주 전에 내놓은 ‘9대 국가전략프로젝트’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또다시 따라쟁이 치코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인공지능, 가상증강현실, 자율주행자동차, 경량소재, 스마트시티가 그 내용인데, 어느 것 하나, 우리나라가 선도하는 분야가 없고, 선진국 따라하기 일색이다.따라하기도 문제거니와 어떻게 선진국을 따라잡을 것인지, 어떻게 선진국과 다른 길을 택할 것인지 구체적인 전략이 없다. 창조경제의 ‘창조’와 ‘퍼스트 무버’의 구호가 무색하다. 이쯤이면 꾸준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따라쟁이 인형에 짜증이 난다. 아직 우리 경제계, 그리고 경제의 미래를 일부 책임져야 할 국가과학기술전략을 마련하는 분들이 퍼스트 무버가 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전략이 없음은 자명하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부족한 창조성은 오래된 중증 질환이며, 과학계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의 기초가 기술이고 기술의 원천이 과학이라는 단순한 공식에 따르면 창조경제가 잘 안되는 이유는 새롭고 창의적인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는 창의적인 과학 성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위의 공식이 심하게 단순화됐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과학의 창의적 성과가 없는 것은 창의적인 연구과제, 창의적인 과학자, 창의적인 학풍이 부족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국가의 기초과학 투자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래 우리의 기초과학은 눈부신 초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10번째로 과학 논문을 많이 쓰는 나라로 성장한 지금, 우리 과학계는 질적 성장이라는 큰 과제를 안게 됐다. 느낌이 팍 오게 얘기하자면, 논문을 양산하는 과학계에서 노벨상을 받을 만한 과학계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질적 성장의 핵심키워드 역시 창의적 과학이다. 따라쟁이 과학이 노벨상을 받을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과제는 분명하지만 우리 과학이 창의적인 과학으로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는가는 분명치 않다. 아직도 선진국에서 유망하다고 하는 분야에 대부분 연구자와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집중돼 따라가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경제계나, 국가과학기술개발전략이나, 과학자들이나 그 태도가 대동소이하다. 이런 국가적이고 사회적이며 시대적인 과제가 잘 안되는 것에 정부정책이나 투자 부족 등을 이유로 드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편리한 발상이다. 과학기술계의 유력인사들이 매일처럼 이런 내용들을 신문에 싣고 있는데, 천편일률적인 얘기라 그 자체로 창의적이지 않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가장 큰 책임은 과학자들 자신에게 있으며, 과학자 자신들이 성장해야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필자를 포함해 과학자들이 지금 하는 연구보다 내년에 하는 연구가 더 창의적이 되도록 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모여서 창의적인 연구과제를 잘 가려내고 지원되도록 해야 한다. 정부 역할은 이런 변화와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유망한 분야가 선진국에서 나왔으니 이를 집중해서 연구하도록 투자하고 유도해야 한다는 식의 정부의 해묵은 전략은 창의적인 과학으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중대한 실수이며, 짜증나는 따라쟁이 치코 인형을 강매하는 꼴이다. 이제 따라쟁이 인형은 벽장에 넣어두고 아이와 마주해 새롭고 신나는 놀이를 해야 할 때다.

염한웅 < 포스텍 교수·물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