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웃지 못하는 '대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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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덕에 쌀생산 역대 최대…산지 쌀값 14.3%나 떨어져온 국민을 힘들게 한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은 뜻밖에도 쌀농사에는 도움이 됐다. 역대 최고 수준의 ‘대풍년’이 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평년에 비해 평균 기온이 높고, 일조량도 많은 데다, 태풍 피해도 없어 대풍의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하지만 황금빛 들녘을 눈앞에 두고도 누구 하나 웃음 짓는 사람이 없다.
농민은 물론 정부·소비자도 쌀값 하락하면 모두 '피해자'
쌀 재고 175만t…적정량의 2배
"농협 쌀 매입 방식 사후정산제로 바꿔야"
11일 농림축산식품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수확기를 앞둔 지난 5일 20㎏ 정곡 기준 산지 쌀값은 3만4288원으로 1년 전 보다 14.3% 떨어졌다. 풍년이 계속되면서 재고가 급증한 데다 올해도 기록적인 대풍이 예상돼 재고 물량이 쏟아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쌀이 남아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재배면적을 꾸준히 줄이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작황이 좋은 데다 기술력까지 향상되면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늘고 있어서다. 올해 벼 재배면적은 77만8734㏊로 전년보다 2.6% 감소했다. 생산량은 오히려 전년 수준(432만7000t)을 웃돌 전망이다.
소비량은 감소하는 추세다. 식생활 트렌드 변화와 1인·맞벌이 가구 증가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2.9㎏으로 전년 대비 3.4% 줄었다. 1990년(119.6㎏)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생산량이 늘어난 데 비해 소비량은 줄어들다 보니 창고에 쌓인 쌀은 역대 최고치다. 지난 6월 말 기준 정부의 쌀 재고량은 175만t으로 지난해 같은 시점(133만t)보다 42만t 많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권장하는 한국 정부의 적정 쌀 재고량은 80만t이다.쌀값이 폭락하면 생산자인 농민과 이를 손해보고 수매해야 하는 농협, 쌀 목표가격과의 차액을 보조금으로 지급해야 하는 정부 모두 피해를 본다.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도 직불금은 세금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쌀값 폭락이 반가울 수만은 없다.
쌀 생산량은 늘지만 소비는 줄고, 가격은 폭락하는 악순환은 갈수록 심각하다. 정부는 쌀 공급 과잉이 쌀값 하락의 근본 원인이라는 판단 아래 이를 해소하기 위한 ‘중장기 쌀 수급안정 대책’을 작년 말 수립하고 추진 중이다.벼 재배면적의 일부를 밭작물로 전환하는 등 쌀 생산을 적정 수준으로 줄이고 쌀 소비를 확대해 수급균형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최근 확정된 내년도 정부 예산에서 900억원 규모인 ‘타작물 재배지원 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등 일정이 순조롭지 않다.
정부가 투입해야 하는 직불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직불금은 벼농사를 하는 모든 농가에 지급하는 고정직불금(㏊당 100만원)과 목표가격(80㎏당 18만8000원)보다 시장가격이 낮을 때 차액의 85%를 보전해주는 변동직불금이 있다. 내년도 변동직불금 예산은 올해보다 35.9% 늘어난 9777억원이다. 하지만 풍작으로 쌀값이 크게 떨어지면 국회 심의과정에서 예산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연간 쌀 생산량의 35~40%가량을 매입하는 농협도 햅쌀 출하를 앞두고 재고 소진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농협의 쌀 재고량은 지난 8월 말 기준 20만9000t으로 전년 동기 대비 40.3% 늘었다.전국 주요 농협하나로마트와 온라인쇼핑몰 농협a마켓을 통해 8월 한 달 동안 농협 쌀 할인행사를 했고 농협주유소 이용 고객을 대상으로 500g 소포장 쌀을 사은품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민간기업의 동참 확대도 유도하고 있다.
농협은 쌀 매입 방식을 사후정산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사전에 수매값을 정해 농가에 지급하고 있는데, 풍년이 계속되면서 농협의 수매값보다 시세가 낮아 손해가 누적되고 있다.
농협 관계자는 “사후정산제는 9월께 산지시세를 기준으로 일정 부분을 우선 농가에 지급하고 생산량이 확정되는 12월 이후 매입가격을 확정해 차액을 지급하는 방식”이라며 “쌀의 안정적인 매입을 지속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