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위의 국·과장들 "W자 일과에 찌든 삶…제대로 된 정책 나올 턱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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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무원으로 산다는 건 (3)“한직이라도 좋으니 국장 행세 좀 해봤으면 좋겠다.”
하루 240㎞ '유랑인생'
스마트폰으로 보고서 읽고 KTX로 이동하며 '카톡 회의'
동선 축소'잔꾀'만 늘어
서울 출장은 목·금·월요일에…세종시 근무는 겨우 주 이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앙부처 하위직 공무원들이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하던 말이다. 그만큼 국장이란 자리는 간단치 않았다. 사무관, 과장 시절 업무능력에 대한 치열한 검증을 통과해야 오를 수 있는 ‘관록’의 자리였다. 정책을 실무단계에서 총괄하는 자리인 만큼 권한도 막강했다. 주요 경제부처 핵심 보직국장 자리는 국무총리가 부럽지 않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전화 한 통만 하면 기관장은 물론 민간 기업 사장, 은행장들이 과천청사 복도에 줄을 섰다.세종시 이전 4년째인 지금으로선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세종에 근무하는 국장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근무여건에서나 처우, 위상 등 모든 면에서 최악이다. 과거 ‘직업이 장관’이었다는 선배 관료들은 행정고시에 붙은 지 20여년 만에 장관 타이틀을 달았다지만, 지금은 20년이 넘어야 겨우 초임 국장급인 부이사관으로 승진한다. 그것도 잘나가는 일부에 해당한다. 국장으로 승진해봐야 좋을 것도 없다. 말 그대로 ‘권한’은 쥐꼬리인 반면 ‘책임’만 무한대다.◆세종 4년간의 유랑(流浪)
‘공무원의 도시’인 세종시의 지난해 중위연령(전체 인구를 일렬로 세웠을 때 가운데 해당하는 나이)은 36.6세다. 서울이나 울산 등 젊은이가 많이 사는 광역시를 포함한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낮다. 행정 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서기관 사무관 주무관 등 젊은 공무원들은 세종에 정착한 반면 실장 국장 과장 등 중간 간부급 이상은 자녀 교육 문제로 서울에 살면서 세종시를 전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로 만들었다는 분석이다.거주지를 서울에 둔 국·과장들의 삶은 피곤함에 찌들어 있다. 국·과장들이 KTX나 셔틀버스 등을 통해 출퇴근하는 거리는 240㎞(왕복) 정도다. “세계에서 출퇴근 거리를 꼽는다면 상위 1% 안에 들 것”(기획재정부 A국장)이란 항변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동선도 복잡하다. 새벽에 눈을 떠 버스나 전철로 서울역이나 용산역으로 이동한 뒤, KTX를 타고 충북 청주시에 있는 오송역에 내려 다시 셔틀버스나 시내버스를 타고 근무지인 세종청사에 도착한다. A국장은 “출근하고 나면 9시도 안 돼 진이 다 빠진다”며 “겨울엔 깜깜한 새벽에 출근하면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우울해진다”고 했다.
◆‘W’ 인생 사는 국·과장
이들이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도로나 철로 위다. 거의 매일 서울로 출장 갈 일이 생겨서다. 청와대와 국회 보고는 국장이나 주무과장에겐 일상이다. 산업통상자원부 B국장은 “정책은 세종에서 만들어지지만 결정권은 서울에 있다”며 “내 삶의 3분의 1은 세종, 3분의 1은 서울, 나머지 3분의 1은 도로나 철로 위”라고 했다.세종으로 출근한 뒤 서울로 출장을 가서 다시 세종으로 오는 동선이 알파벳 N과 닮았다고 해서 ‘N’, 여기서 서울로 다시 복귀하는 ‘W’자(字)의 생활을 하고 있는 세종의 국·과장들은 이로 인해 정작 업무를 볼 수 없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고 입을 모은다. 기재부 C국장은 “흔들리는 KTX나 버스 안에서 조그만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열어 보고서를 챙기지만 업무 집중력이 떨어져 피드백을 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무관들의 보고서를 첨삭하는 건 둘째치고 회의를 할 시간조차 없어 관료들의 도제식 교육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면 된다”며 “공무원 사회 전체가 하향 평준화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기재부 D국장은 “공무원들이 서울에서 일을 볼 수 있는 ‘스마트워크센터’에선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사용해선 안 되고, 내 컴퓨터도 아니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없다”며 “카카오톡으로 회의하고 사무실 빈 좌석을 찾아다니는 ‘메뚜기 신세’에서 정책의 깊이나 속도가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과장 사이에서도 ‘잔꾀’만 늘어난다. 조정이 가능한 서울 출장 업무를 목·금·월요일로 모는 식이다. N자나 W자형의 동선을 그리지 않고 주말까지 서울 집에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총리실 소속 E과장은 “이런저런 꾀를 내서 동선을 짧게 만드는 데 보람을 느끼는 관료사회라면 할 말 다하지 않았는가”라며 “4년간 고민했지만 ‘도로 위의 국·과장’ 문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게 더 한탄스럽다”고 했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