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움츠러든 '김영란법'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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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외부식사 금지령'…공무원 사이엔 '몸조심 10계명' 나돌아“여름철 손실을 메워야 하는데 저녁 손님이 한 명도 없으니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에요.”(서울 북창동 인근 일식당 주인)
한정식집 "줄잇는 예약 취소…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급식당 '썰렁' 축하 난 '반송'…구내식당·국밥집은 '북적'
“이러다가 다 해고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서울 소공동 A호텔 고급 식당 종업원)‘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서울 시내와 세종시 관가 등 식당가 분위기는 예상대로였다. 한정식과 일식, 복집 등 고급 식당은 직격탄을 맞았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 400만여명뿐 아니라 민간기업 관계자들도 잔뜩 움츠러들면서다. 직무관련성 개념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모호해 자칫 ‘시범 케이스’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고급 식당가 ‘직격탄’
이날 낮 12시40분께 서울시청 앞 더플라자호텔의 고급 일식집엔 손님이 5개팀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평소에는 뛰어다녀야 할 정도로 바쁜데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지배인을 포함한 경영진은 오전부터 대책 회의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호텔은 이날 레스토랑 예약률이 평소보다 30%나 감소했다고 전했다.점심에 3만원 이하 ‘김영란 메뉴’를 선보인 고급 식당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세종시의 유명 한우집 사장은 “점심에 손님이 평상시의 절반 이하로 확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저녁이 되자 고급 식당들이 자리 잡은 먹자골목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 일찍 문을 닫는 곳도 적지 않았다. 북창동 먹자골목에 있는 C복집 주인은 “어제부터 이틀 연속 저녁 손님이 한 명도 없어 8시 조금 넘어 문을 닫았다”며 “단가가 비교적 낮은 복어찜이라도 만들어 팔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국회 인근 서여의도도 한산했다. 인근 일식집 주인은 “저녁 손님 2개팀을 받았는데 모두 김영란법 때문에 장사가 안 될까봐 일부러 찾아온 단골들”이라며 “종업원에게 손님들이 ‘란파라치’로 인해 괜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다”고 말했다.꽃집 상황은 더 심각했다. 여의도에서 몇 년째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57)는 “전날 산업은행의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동양란 선물 주문이 딱 한 건 있었다”며 “이마저도 배달갔더니 반송시키더라”고 토로했다.
◆기업인도 “당분간 몸조심”
기업인들까지 몸을 사리면서 충격이 더 크다는 게 식당 주인들의 얘기다. 대기업 상당수는 당분간 임원들에게 ‘외부 식사 금지령’을 내렸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은 아니지만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 대기업 임원은 “김영란법이 정착될 때까진 외부 식사를 모두 금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의 대관업무 담당자는 “이번주부터 대관 일정을 아예 잡지 않았다”며 “내부적으로 당분간 아무 곳도 나가지 말고 부처 담당자와 전화로 통화하자고 입을 모았다”고 했다.구내식당과 서민 대상 음식점들은 반사이익을 누렸다. 북창동의 한 국밥집은 점심시간 자리가 없어 줄이 길게 늘어섰다. 2개층을 사용하는 인기 음식점이긴 하지만 평소보다 줄이 길었다는 게 손님들의 설명이다. 이 식당의 국밥 한 그릇 가격은 6000원이다. 공무원 이모씨(39)는 “한동안은 구내식당이나 가격대가 낮은 음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세종청사 2동에 있는 구내식당은 이날 평소보다 많은 550인분의 점심을 준비했는데 584명이 다녀갔다.
◆공무원들 ‘10계명’ 인기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일명 ‘란파란치’ 그물을 피하기 위한 ‘김영란법 10계명’이 나돌았다.구체적으로 △직무관련자의 기프티콘은 지체 없이 신고하라 △제자나 부하에게는 물 한 잔도 얻어먹지 마라 △골프장 갈 때나 식사 후에 카풀을 하지 마라 등이다. 2만9000원짜리 김영란 세트를 먹은 뒤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택시를 얻어탔다가는 법 위반이 될 수 있다는 등 구체적인 조언이 담겨 공무원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계속적인 거래가 오가는 사람이 이성이라면 차라리 사귀어라’는 자조적인 내용도 담겨 있다. 연인 사이에는 김영란법의 식사 및 선물 가격 제한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혜/황정환/김재후/고은빛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