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결국 '프로 불편러'가 되고 마는 사람들

내면의 상처 탓 불거지는 여혐·남혐 논란
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마음으로 보는 탓
다 상처받은 사람이란 생각으로 배려해야

강병훈 <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 정신과·소아정신과 전문의 >
남녀가 서로를 적대시했다는 얘기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자주 다뤄졌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아킬레우스 등 당대 제일의 영웅과 맞선 아마존족의 여왕 이야기는 번번이 남성 영웅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겉으론 남성우월주의를 얘기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매번 남성 영웅에게 유린당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여성들의 끈질긴 저항을 보여주는 얘기이기도 했다. 어찌됐건 남과 여는 당시에도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갈등을 겪었으며 이는 신화적으로 표현될 만큼 보편적인 것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신화에 나온 남녀 간의 싸움이 2016년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강남 살인 사건이라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김치남’ ‘김치녀’ ‘루저’ ‘맘충’ ‘한남충’ 등 인터넷에서는 각종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신조어가 넘쳐났으며, 확인되지 않은 얘기가 인터넷에서 사실인 양 돌아다니며 남녀 서로에 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포털사이트의 기사와 댓글을 보면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그야말로 혐오라는 단어가 적절하다고 여겨질 정도다.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신화에서의 남녀 간 싸움과 현실에서의 남녀 간 싸움은 큰 틀에서만 같을 뿐 내용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신화에서는 남녀 간에 누가 주도권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싸움, 즉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지닌 싸움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녀 간 싸움은 그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많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런 갈등과 싸움을 통해 각자가 이성적으로 느끼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서로의 갈등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닌 분노나 공격성 등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자 자신에게 이런 특성이 있다는 부분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상대방에겐 이런 감정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또 하나의 비난과 조롱의 빌미로 삼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피곤해 보인다고 해서 전혀 의미 없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간접적으로 이번 ‘남혐’ ‘여혐’의 논란이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이런 방식은 마음의 상처, 즉 정신적 트라우마가 갈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자리잡을 때 나타나는 방식이다. 과거 혹은 어린 시절의 일로 인한 내면의 분노가 현재에 터져나올 때 서로 논리적인 해결보다 감정적인 분출이 앞서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제 해결 없이 비난과 조롱만이 계속 오가는 상황도 이해될 수 있다. 각자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분노와 공격성이 내면에 자리잡은 시기와 이유는 각자 달라 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마음으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얘기가 오가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당연해 보이는 일이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이는 내면의 상처가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정신적 트라우마란 어린 시절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얘기하는데, 남성의 공격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여성 쪽에서 보면 주로 어린 시절에 남성으로부터 받은 물리적, 성적 폭력이나 배신, 배반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남성에게도 이런 내면의 상처는 있다. 여전히 늘 주변 사람과 비교되는 경쟁 중심의 문화와 아직 한국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유교주의는 남성으로 하여금 중압감을 지니게 하고, 이는 열등감과 자괴감으로 이어져 남성들의 내면에 상처를 남긴다.

남혐, 여혐 논란은 결국 이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얘기다. 서로의 상처를 보면서도 애써 자신의 상처만 중요하다 여기고, 남의 상처는 비난하고 조롱하는 방법으로 후벼팔 때 서로는 서로에게 괴물이 된다. 애써 후벼파지 않더라도 “언냐들,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말이 보여주듯 공감받기만을 바라고 그 자신은 타인의 상황을 공감하거나 배려하지 않을 때 결국 ‘프로 불편러(불편을 전문적으로 얘기하는 사람)’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서 서로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자연스럽게 공감과 배려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

강병훈 <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 정신과·소아정신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