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OLED의 O자도 몰랐지만…신기술 만든다는 열정이 개발 앞당겨"

대한민국 OLED 양산 10년

OLED 세계 첫 양산 주역
정호균 전 삼성디스플레이 부사장

1999년 당시 김순택 사장
OLED 아니면 미래 없다고 판단
불확실성 안고 개발 들어가

스마트폰 확산된 2007년 첫 양산
동영상에 강한 'OLED 시대' 열어

중국보다 기술력 앞서지만
추격 속도 빨라 방심은 금물
중국 기업에 인재 뺏기는 일 없어야
지난 5월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계 정보디스플레이 학회(SID) 디스플레이 위크’. 하이라이트인 ‘칼 페르디난드 브라운상’ 수상자로 단상에 오른 사람은 정호균 성균관대 성균나노과학기술원 교수(사진)였다.

TV 브라운관을 발명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브라운 박사를 기념해 1987년 제정된 이 상은 SID가 업계 최고의 혁신을 이룬 사람을 뽑아 수여한다. 정 교수는 2000~2008년 삼성SDI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연구소장을 맡아 OLED 세계 최초 양산을 이뤄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2009~2010년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부사장, 고문을 거쳐 2011년부터 성균관대 나노과학기술원에서 플렉시블 OLED를 연구하고 있다. 정 교수를 만나 OLED 개발 과정에 대해 들었다.▷‘칼 페르디난드 브라운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OLED는 2000년 초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 제가 상을 받게 된 건 세계 업계가 이제 LCD(액정표시장치)가 아니라 ‘OLED가 대세’라는 걸 공식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주는 상이지만 실제로는 OLED 업계 전체에 준 거죠.”

▷OLED는 한국에서 처음 양산됐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우리 전자산업에서 가장 큰 게 반도체, LCD 그리고 OLED입니다. 그중 반도체와 LCD는 미국 일본에서 개발한 것인데, 우리가 집중 연구와 투자로 따라잡았습니다. 하지만 OLED는 우리가 처음 상업화한 기술입니다. 자체 개발하니까 지금도 OLED 시장을 90% 이상 점유하고 있고, 장비 생태계도 우리 기업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전문가로 압니다. 어떻게 OLED를 개발하게 됐습니까.(정 교수는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박사를 받은 뒤 1988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로 입사했다.)

“입사 후 메모리사업부에서 12년간 일하며 상무를 달았습니다. 1999년 안식년을 받아 미국에서 재충전 중이었는데, 다음해 1월 삼성SDI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더군요. 당시 SDI가 신사업 개발을 위해 삼성전자에 ‘반도체 전문가를 달라’고 요청해서였죠. 그렇게 SDI로 옮겨 OLED 개발팀장으로 명 받았습니다.”▷반도체 기술이 OLED 개발에 도움이 됐나요.

“OLED는 반도체 기술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습니다. 나노 스케일로 움직이니까요. 또 소재, 회로, 공정이 모두 반도체와 같습니다.”
OLED패널이 주인공이 될 미래 디스플레이
▷SDI는 당시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을 개발 중이었는데, 왜 OLED 개발에 나섰나요.“1999년 12월 당시 김순택 씨가 SDI 사장이 되더니 ‘주력 제품인 브라운관은 곧 사라질 것이니까 신사업을 찾아야 한다’며 PDP, OLED, 배터리 등 신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했습니다. OLED는 자발광이어서 이론적으로는 압도적인 기술이었습니다. 양산할 수 있느냐가 의문이었죠. 하지만 김 사장이 ‘이거 아니면 SDI 미래가 없다. PDP는 어차피 TV용밖에 안 된다’며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개발 결정 자체가 어려웠군요.

“OLED는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삼성 내에서도 부정적 시각이 컸죠. 일본이 우리보다 3년 이상 빨리 개발을 시작한 데다 워낙 신기술이고 일본도 개발이 끝난 게 아니어서 배울 롤 모델도 없었습니다. 또 당시 LCD 생태계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던 때여서 LCD를 넘어설 수 있느냐도 불확실했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어려운 점도 많았을 텐데요.

“OLED의 O자도 모르는 인력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이 반도체를 처음 개발할 때처럼 세계 첫 신기술을 개발한다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회사에 양말을 쌓아놓고 자고 샤워하고 양말 신고 바로 일하고 그랬지요. 지금 삼성디스플레이의 김성철 부사장, 김해동 상무와 김병희 상무(퇴임), 권장혁 경희대 교수 등이 당시 핵심 멤버들입니다.”

▷획기적 전기가 있었나요.

“2000년 팀을 구성하고 바로 증착기를 도입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통상 석 달 걸리는 장비 설치를 한 달 만에 끝내고 샘플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석 달 만인 2001년 3월 말 8.4인치 크기의 풀컬러 샘플이 나왔는데, 완벽한 품질은 아니었지만 놀랍더라고요. 얇고 색상도 좋고 동영상도 잘 돼서 ‘이건 되는 거다’란 판단이 섰죠. 그래서 막무가내로 그해 6월 SID에 샘플을 들고 나갔습니다.”

▷반향이 컸겠네요.

“전시 공간을 미리 확보하지 않아 우리 연구원 중 하나가 OLED 논문을 발표할 때 헝겊으로 덮어놨던 8.4인치 OLED 샘플을 공개했습니다. 250명이 세션에 참석했는데 난리가 났죠. 일본 닛케이(니혼게이자이)신문이 대서특필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전 소니가 13.1인치 OLED 패널을 개발했다고 발표해 약간 김이 빠졌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15인치를 개발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인 9월 중순 샘플 3개를 만들어냈습니다. 일부 결함은 있었지만 시야각도 좋고, 동영상이 완벽하게 구동됐습니다. 김 사장이 이건희 (삼성) 회장한테 보여드리자고 하더군요. 당시 중국 출장 중이던 이 회장을 찾아가 시연했습니다. 회장이 “가능성 있겠다”고 칭찬했고, ‘자랑스런 삼성인상’도 수상했습니다.”

▷그게 2002년인데 왜 양산이 2007년까지 늦어졌나요.

“2002년 당시 양산 목표를 2005년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룹 차원에서 투자 승인이 안 나는 겁니다. 비서실에서 ‘삼성전자도 아니고 삼성SDI가 과연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며 결함 없는 제품을 갖고 오라고 요구했죠.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2004년 사업화 팀이 따로 꾸려졌고 2005년 투자 승인이 났습니다. 2006년 설비 반입을 거쳐 2007년 10월 양산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리버와 일본 교세라 휴대폰에 처음 들어갈 때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양산 투자가 늦었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가장 적기였습니다. OLED 패널이 당시 비쌌기 때문에 일반 휴대폰 시장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스마트폰이 나오자 사람들이 모바일로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죠. 동영상에 강한 OLED가 날개를 펼칠 시기였던 것이죠.“

▷LCD에서 따라온 중국이 OLED에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OLED굴기’라고 할 정도로 집중적으로 OLED 사업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잘하고 있지만 방심하면 안 됩니다. 더 차별화하고 경쟁력 있는 기술을 계속 개발해야 합니다. 국가에서도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이 따라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걱정되는 건 많은 한국의 OLED 인력이 중국에 가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 BOE엔 수백명의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가 있다고 합니다. 업계가 사람을 자산으로 생각하고 지켜야 하는데, 지금은 부장급이 50세가 넘으면 명예퇴직시켜 버립니다. 회사를 떠난 사람들은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LCD처럼 바로 따라잡히진 않겠지만 머지않아 (중국이) 엄청난 스케일로 따라올 것입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