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세비야, 상상했던 모든 스페인과 만난다

플라멩코·투우…'정열의 도시' 스페인 세비야

좁은 산타크루즈 골목을 지나다보면 문득 카르멘이 나타날 것 같아…
해질녘, 타파스 바의 틴토 한잔은 플라멩코 무희의 넘실대는 몸짓을 닮아
세비야 성당 내부에 있는 콜럼버스의 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베리아 반도의 길고 파란만장한 역사가 낳은 다양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예컨대 지지 않는 태양, 정열적인 플라멩코, 용맹스러운 투우사, 자유로운 집시의 영혼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모든 스페인이 현실이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 세비야다.

모스크 위에 올려진 거대한 성당스페인 남쪽 끝, 지브롤터 해협 너머 모로코를 마주하는 곳에 자리 잡은 안달루시아. 800년간 이어진 아랍의 지배를 거쳐 대항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와 영광을 꽃피운 대지. 가장 이국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스페인다운 토양을 지닌 이 땅의 중심에 세비야가 있다. 세비야의 또 다른 말이 정열이라고 했던가. 이를 방증하듯 세비야의 태양은 계절을 잊은 채 여전히 뜨겁게 타오른다. 경쾌한 마차의 말발굽 소리를 쫓아 콘스투티시온 대로를 걷는다. 얼마 되지 않아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도시의 상징인 세비야 대성당이다. 유럽에 성당만큼 흔한 것이 없다지만 세비야 대성당은 특별하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사원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당 건립 당시 규모에 놀란 이들이 ‘미친자들의 작품’이라며 혀를 내둘렀겠는가.

과거 유대인 거주지역이던 산타크루즈 지구에 있는 좁은 골목.
화려한 외관만큼이나 성당 내부 또한 볼거리가 풍성하다. 예수의 일생을 조각한 황금빛의 중앙제단, 고풍스러운 성가대석, 7000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오르간, 15세기 조각품은 물론 무리요와 고야를 비롯한 유명 화가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 마치 스페인 전성기 때의 예술품을 집대성해 놓은 박물관에 와 있는 듯하다. 성당 남문 쪽에는 콜럼버스가 안치돼 있다.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국왕의 조각상이 관을 공중에 번쩍 들고 있는 모양새가 독특하다. 이탈리아 출신 항해가 콜럼버스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신항로를 개척했다.그러나 여왕 사망 후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그는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그의 유언대로 땅속이 아니라 공중에 들린 채로 말이다.
1929년 에스파냐 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지은 스페인 광장.
낭만이 가득한 골목에서 스페인 최고의 광장까지

세비야 성당은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지어졌지만, 곳곳에서 모스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랍인들이 세운 회교사원을 허물고 그 위에 지은 까닭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렌지 뜰이라 불리는 이슬람식 정원과 히랄다(Giralda) 탑이다. 풍향계란 의미의 히랄다 탑은 본래 미나렛(첨탑)이었으나 돔을 떼어내고 28개의 종루를 달아 성당의 종탑으로 개조됐다. 히랄다 탑의 진가는 꼭대기에 올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계단 없이 경사면으로만 이어진 길을 따라 34층 정상에 올라서면 도시 최고의 전망이 눈앞에 펼쳐진다. 과달비르크 강을 따라 여유롭게 흐르는 세비야의 삶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히랄다 탑에서 바라본 세비야 전경.
세비야 대성당 뒤쪽으로 향하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산타크루즈 지구로 옮겨진다. 산타크루즈 지구는 유대인이 레콘키스타로 추방당하기 전까지 거주한 지역이다. 세비야의 어느 곳이 낭만적이지 않겠느냐만, 이곳은 특히 그렇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마치 미로처럼 엉켜 있다. 하얗게 회반죽이 칠해진 가옥들과 오래된 선술집, 고즈넉한 카페들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이끈다. 오렌지 나무 향기에 취해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막다른 길에 다르거나 헤매기 일쑤지만 문제는 없다. 또 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머리에 붉은 꽃을 꼽은 카르멘 같은 여인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까. 이곳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느껴진다. 산타크루즈 지구 주변은 레스토랑은 물론 유명한 타파스 바가 몰려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양조장을 개조해 만든 보데가가 특히 유명하다. 북적이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안달루시아 지방의 칵테일 격인 틴토와 클라라를 홀짝이다 보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스페인 예술의 꽃, 플라멩코

산타크루즈 지구에서의 숨바꼭질을 끝내고 알카사르 궁전과 무리요 정원을 지나 스페인 광장으로 향한다. 이 광장은 1929년 에스파냐 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지어졌다. 부채처럼 둥글게 휜 광장은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인공 수로로 둘러싸여 있다. 아치형 다리 밑으로 노를 저으며 지나가는 배의 풍경에 언뜻 베네치아가 떠오르기도 한다. 본 건물 벽면에는 스페인을 구성하는 17개 자치 지방의 지도와 특징이 세밀하게 조각돼 있다. 형형색색의 타일 공예에서 안달루시아 지방 특유의 이슬람 정취가 느껴진다. 광장 중앙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분수에 앉아 광장을 굽어본다. 광장이 아니라 궁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아름다움이다.
플라멩코를 추는 무희의 표정이 강렬하다.
세비야가 ‘정열의 도시’라는 칭호를 달게 된 것은 플라멩코의 공이 클 것이다. 붉은 드레스와 격정적인 춤사위, 스페인 예술의 꽃으로 대변되는 플라멩코의 발원지가 바로 안달루시아 지방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플라멩코를 단순히 춤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플라멩코는 본래 칸테(Cante)라 불리는 노래 위에 바일레(baile·춤), 토케(toque·음악적 기교), 할레오(jaleo·손뼉과 추임새)가 합쳐진 종합예술이다.

집시의 한과 슬픔이 응축된 음악

플라멩코는 흔히 집시의 음악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집시 민족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플라멩코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시만의 음악이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이베리아 반도에 집시가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15세기경. 인도 라자스탄을 떠나 유럽의 끝까지 건너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영이 아니라 핍박과 냉대였다. 그러나 이 땅에서 비참했던 것은 비단 집시 민족뿐만이 아니었다. 그라나다를 마지막으로 아랍 왕조가 무너지면서 무어인들은 800년 동안 빚어온 삶의 터전을 잃었다. 유대인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톨릭 왕조의 탄압을 피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동굴에 숨어서 견뎌내는 것뿐. 그들은 절망으로 울부짖고, 땅을 구르며 증오와 갈망을 표현하고, 팔을 휘저으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러니까 플라멩코는 이 땅에서 설움에 몸부림쳤던 민족들의 슬픔과 각자의 문화,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토착문화가 융합된 결정체인 셈이다. 진정한 플라멩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안달루시아 대지의 귀신인 ‘두엔데’를 넣어야 한다고 한다. 정확히 두엔데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이는 없지만,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다. 우리네 정서인 ‘한’을 딱히 설명할 길이 없지만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산타크루즈 지구의 야경
안달루시아에서도 플라멩코의 본고장이라 주장하는 세비야에는 크고 작은 공연장이 즐비하다. 하루 전 예약한 뒤 오후 느지막이 공연장을 찾는다. 무대 조명이 꺼지자 구슬픈 노래 가락이 울려 퍼진다. 붉은 술이 달린 전통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의 몸짓은 기타 선율과 칸테의 깊음이 더해질수록 무아지경으로 빠져든다. 무용수가 마지막 스텝을 절도 있게 밟자 객석에서는 “올레!”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야말로 스페인의 정수, 세비야의 정열이다.

세비아=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여행팁
플라멩코 공연은 무용수, 가수, 기타 연주자가 한 팀을 이룬다.
한국에서 세비야로 가는 직항은 없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렌페 기차로 약 2시간40분이 걸린다. 세비야 대성당 입장권은 8유로다. 대기 줄이 길다면 약 500m 떨어진 살바로드 성당에서 통합권(9유로)을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플라멩코 공연은 현장 예매도 가능하지만 온라인(flamencotickets.com)을 통해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공연장마다 공연 방식, 스케줄, 가격이 다르다. 매년 부활절 전주에는 종교 축제인 ‘세마나 산타’가 열린다. 스페인 전역에서 열리지만 세비야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페리아 데 아브릴’이라는 봄맞이 축제도 큰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