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리뷰 '트로이의 여인들'

갈등의 심연서 끌어올린 소리…창극예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오는 20일까지 공연하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한(恨)의 정서가 깃든 판소리에 트로이 여인들의 비극이 제대로 실렸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창작 창극이 나아가야 할 전형을 제시한다. 판소리가 지닌 서사의 힘과 음악의 아름다움이 잘 짜인 대본, 현대적인 연출과 만나 창극 무대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극적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은 그리스 연합군과의 오랜 전쟁에서 패배한 트로이 여인들의 처참한 운명을 그렸다. 극작가 배삼식은 창극에 안성맞춤인 마당 형식으로 구성했다. 마당마다 갈등 구조를 집어넣어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여인들의 고통을 촘촘히 드러낸다. 첫 마당부터 트로이 여인들의 일방적인 신세 한탄이 아니라 ‘낙원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왕비, 공주들과 ‘지옥이 또 다른 지옥으로 바뀌었을 뿐’인 노예들의 갈등을 드러내며 극적 긴장감을 준다.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처지를 설명하는 것은 갈등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한 소리 그 자체다. 운율을 살린 배삼식의 찰진 대사는 안숙선 명창이 지은 창(唱)에 착 달라붙는다. 정재일 음악감독은 판소리 특성을 살려 인물마다 하나의 악기만을 배치했다. 극을 주도하는 왕비 헤큐바에는 거문고가,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공주 카산드라엔 대금이, 갓난아이를 잃은 안드로마케엔 아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백미는 후반부의 ‘팜파탈 헬레네 마당’이다. ‘창극 아이돌’ 김준수가 짙은 화장을 하고 전쟁의 원인이 된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연기한다. 헬레네와 어우러지는 악기는 정 감독이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피아노다. 김준수의 힘 있는 소리와 정 감독의 현대적인 음악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

작품을 연출한 옹켄센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은 단출한 세트와 영상으로 소리의 힘에 집중하는 판을 깔아준다. 그 위에 창극단원들은 기량을 마음껏 뽐낸다. 분노와 처연함, 애절함을 오가는 다양한 감정을 쏟아내는 헤큐바 역 김금미의 격정적인 열창은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야기를 풀어가며 소리를 뒤에서 받치는 코러스 배우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안 명창은 창극의 도창처럼 처음과 끝에 등장해 극을 해설하고 주제를 전하는 고혼(孤魂)으로 등장해 극의 완결성을 높인다.무대에 빠져든 객석에선 ‘얼씨구’ ‘그렇지’란 추임새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마당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자연스레 터진다. 창극이란 이런 것이다. 장르를 떠나 ‘올해의 공연’으로 꼽힐 만한 무대다. 오는 20일까지,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