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조롱받을 용기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지금은 주류 경제학 대접을 받지만 ‘레이거노믹스’는 조롱과 함께 출발했다. ‘B급 배우’의 머리에서 나온 ‘B급 이론’이라는 뉘앙스가 물씬했다. 감세와 작은 정부를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파는 ‘부두(주술) 경제학’이란 경멸적인 평가를 들어야 했다. 당시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에 태클을 건 죄(?)였다. 일종의 숙명이었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레이거노믹스는 의회 등으로부터 간단없는 중단 압력에 시달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금세 바뀌었다. 취임 2년차부터 반등한 경기는 92개월이라는 기록적 팽창을 보였다. 취임 때 14%였던 인플레는 퇴임 시 4%, 실업률은 10%에서 5%로 개선됐다.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25년가량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인플레 없는 성장’도 레이거노믹스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주술'로 폄하받은 레이거노믹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칭한 레이건의 강경 외교도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전임 카터 행정부의 국방장관 아서 슐레진저는 “모스크바에 가보니 철갑상어 알 말고는 다 있더라”며 “조금만 밀면 무너질 것이란 미국의 믿음은 농담일 뿐”이라고 빈정거렸다. 유럽 정상들도 ‘총질 좋아하는 카우보이’라고 수군대며 은근히 무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적과 같은 동서냉전의 종말이었다. 레이건 이후 세계는 비로소 전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조롱은 진실의 훼방꾼이었다. 대체로 절박하지 않은 자들의 유희이거나, 악의적 적대감이 기원이다. 확산일로인 우리 내부의 조롱 문화도 마찬가지다. 최순실 사태는 ‘왕정국가인 줄 알았는데, 굿 사진을 보니 신정국가였네’라는 조롱심리로 불이 붙었다. 문제의 사진은 굿이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영산재’ 장면이었다. 조작되고 조직화된 조롱의 힘은 표현의 자유마저 위협 중이다. 그 막강한 화력은 사상의 시장을 자기검열과 눈치보기로 몰고 있다. 작가 이문열 정도가 저항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작가’ 이문열의 글에 정청래가 대놓고 ‘촛불이 당신의 책을 불태울 것’이라고 조롱하는 상황을 봐야 하는 것은 실로 골계미학적이다. 한때 ‘책 장례식’까지 겪은 그의 반복되는 고초에 문화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세상을 바꾸는 '조롱받을 용기'

서울시청 앞 대한문에서 열리는 ‘태극기 집회’에 대한 일각의 조롱은 지적 타락의 정점을 보여준다. 유희적 조롱부대는 대한문 앞에 모인 시민들을 깊게 파인 주름과 굽은 등짝만으로 열등하다 낙인찍는다. 언제부터 동방무례지국이 되었다는 것인지.

전두환 군사정부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고(故) 김재익 경제수석은 ‘김일성도 모실 사람’이란 일각의 조롱에 시달렸다. ‘김일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기꺼이 부역하겠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전문가로서의 소명을 우선한 그의 신념은 ‘경제만큼은 전두환 시절이 그립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국 경제를 업그레이드시켰다. 박정희식 개발 전략의 장점은 흡수하면서 부정적 유산만을 덜어냈다는 평가다. ‘최고의 경제관료’라는 명예도 얻었다. 역사의 월계관은 ‘조롱받을 용기’를 가진 자의 몫이다. 손쉬운 타협으로 잠시 세를 얻을 수 있지만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다. 그것이 구불구불 전진하는 역사가 간직한 비밀이자 진면목이다. 광장의 시민, 정치인, 특검, 헌법재판관 등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순리를 숙고해 볼 일이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