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를 이기는 도쿠가와 리더십(3) 정공법으로 최후의 승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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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공법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다
“천하를 얻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는 정치인, 정공법으로 승부해야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시대별로 인물평이 극명하게 갈렸던 무장도 드물다. 이에야스는 에도시대 260여년 동안 ‘도쿠가와 막부’의 창시자로서 ‘神君(공적이 큰 군주에 대한 존칭)’으로 불렸다. 그는 일반인들이 감히 넘보기 어려운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여졌다. 이에야스에 대한 비판은 막부체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에도시대에 신의 위치로 올라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체제가 무너지자 ‘너구리같은 능구렁이’ ‘속이 시꺼먼 남자’ 등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이에야스가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인 인간상으로 갑자기 평가가 달라진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야스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형편없는 ‘인물’로 그려졌다. 메이지 신정부는 자신들이 타도한 막부체제를 부정하기 위해 에도막부 창시자인 ‘이에야스’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이에야스의 인물평은 ‘신’에서 ‘너구리’로 곤두박질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복권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뤄졌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시기인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이에야스는 ‘막번체제’를 만들어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됐다. 또 인재 등용과 배치에도 뛰어나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기초를 쌓았다는 재평가를 받았다. 패전 이후 국가 재정비에 나선 일본정부 입장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의 경쟁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처럼 ‘천재형’ 무장은 아니었다. ‘둔재형’인 이에야스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국가 재생을 위해 위대한 영웅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만큼 적절한 역사상 인물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후 일본에서 다시 추앙받은 것은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정공법’ 덕분이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교해 지략이나 전략이 크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힘을 길러 뚝심으로 최후의 승자가 됐다. ‘인내의 상징’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방 연합군에게 패전한 일본 국민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100여년의 약육강식의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많은 무장을 제치고 가장 사랑을 받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에야스는 눈앞의 승리를 위해 얕은 계략을 쓰는 대신 천하를 얻기 위해 ‘정공법’으로 목숨을 던졌다. 스스로 실력을 기르고 힘을 비축한 뒤 정정당당하게 일본 천하를 얻었다. 마침내 그는 난세를 마감하고 평화시대를 열었다.실제로 이에야스가 정공법을 택한 ‘전투’ 수없이 많다. 이에야스가 권모술수 대신 정공법을 쓴 대표적인 사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조’ 공격이었다. 히데요시가 호조를 칠 때 가장 신경 쓰인 것이 이에야스의 대응이었다. 호조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사위였으므로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에게 의지할 게 분명했다. 특히 동쪽에 있는 호조를 정벌하려면 이에야스의 영내를 통과해야 하는데 과연 그를 믿어도 좋을까하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다.
이에야스의 태도는 분명했다. 당당하게 히데요시와 대결하는 일은 있어도 비겁한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지만, 히데요시의 의심병에 걸리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야스는 1590년 1월3일 대를 이을 자식인 나가마루(훗날 2대 쇼군 히데타다)를 교토로 인질로 보내 히데요시를 안심시켰다.
당시 히데요시가 몇 명의 부하만 데리고 이에야스의 영내에 들어왔을 때 일부 신하들은 그를 없애고 승기를 잡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어떻게 신의를 저버릴 수 있냐며 반대했다. 이에야스는 “우리를 믿고 온 사람을 새장 속의 새를 죽이듯 몹쓸 짓을 할 수 없다. 천하를 얻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쳤다.이에야스가 좋아한 것은 야전에서 자웅을 겨루는 일이었지, 모략이나 장기 포위전이 아니었다. 그의 전투는 늘 평범하고 재미없는 ‘정공법’이었다. 이에야스는 무력 신봉자였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하게 복종했다. 그는 이마가와에 복종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깨끗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당한 무력’을 내세운 이에야스는 천재적인 무장들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글: 최인한 한경닷컴 대표 janus@hankyung.com
그림: 이재근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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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얻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는 정치인, 정공법으로 승부해야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시대별로 인물평이 극명하게 갈렸던 무장도 드물다. 이에야스는 에도시대 260여년 동안 ‘도쿠가와 막부’의 창시자로서 ‘神君(공적이 큰 군주에 대한 존칭)’으로 불렸다. 그는 일반인들이 감히 넘보기 어려운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여졌다. 이에야스에 대한 비판은 막부체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에도시대에 신의 위치로 올라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체제가 무너지자 ‘너구리같은 능구렁이’ ‘속이 시꺼먼 남자’ 등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이에야스가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인 인간상으로 갑자기 평가가 달라진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야스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형편없는 ‘인물’로 그려졌다. 메이지 신정부는 자신들이 타도한 막부체제를 부정하기 위해 에도막부 창시자인 ‘이에야스’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이에야스의 인물평은 ‘신’에서 ‘너구리’로 곤두박질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복권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뤄졌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시기인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이에야스는 ‘막번체제’를 만들어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됐다. 또 인재 등용과 배치에도 뛰어나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기초를 쌓았다는 재평가를 받았다. 패전 이후 국가 재정비에 나선 일본정부 입장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의 경쟁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처럼 ‘천재형’ 무장은 아니었다. ‘둔재형’인 이에야스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국가 재생을 위해 위대한 영웅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만큼 적절한 역사상 인물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후 일본에서 다시 추앙받은 것은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정공법’ 덕분이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교해 지략이나 전략이 크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힘을 길러 뚝심으로 최후의 승자가 됐다. ‘인내의 상징’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방 연합군에게 패전한 일본 국민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100여년의 약육강식의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많은 무장을 제치고 가장 사랑을 받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에야스는 눈앞의 승리를 위해 얕은 계략을 쓰는 대신 천하를 얻기 위해 ‘정공법’으로 목숨을 던졌다. 스스로 실력을 기르고 힘을 비축한 뒤 정정당당하게 일본 천하를 얻었다. 마침내 그는 난세를 마감하고 평화시대를 열었다.실제로 이에야스가 정공법을 택한 ‘전투’ 수없이 많다. 이에야스가 권모술수 대신 정공법을 쓴 대표적인 사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조’ 공격이었다. 히데요시가 호조를 칠 때 가장 신경 쓰인 것이 이에야스의 대응이었다. 호조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사위였으므로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에게 의지할 게 분명했다. 특히 동쪽에 있는 호조를 정벌하려면 이에야스의 영내를 통과해야 하는데 과연 그를 믿어도 좋을까하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다.
이에야스의 태도는 분명했다. 당당하게 히데요시와 대결하는 일은 있어도 비겁한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지만, 히데요시의 의심병에 걸리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야스는 1590년 1월3일 대를 이을 자식인 나가마루(훗날 2대 쇼군 히데타다)를 교토로 인질로 보내 히데요시를 안심시켰다.
당시 히데요시가 몇 명의 부하만 데리고 이에야스의 영내에 들어왔을 때 일부 신하들은 그를 없애고 승기를 잡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어떻게 신의를 저버릴 수 있냐며 반대했다. 이에야스는 “우리를 믿고 온 사람을 새장 속의 새를 죽이듯 몹쓸 짓을 할 수 없다. 천하를 얻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이며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쳤다.이에야스가 좋아한 것은 야전에서 자웅을 겨루는 일이었지, 모략이나 장기 포위전이 아니었다. 그의 전투는 늘 평범하고 재미없는 ‘정공법’이었다. 이에야스는 무력 신봉자였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하게 복종했다. 그는 이마가와에 복종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깨끗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당한 무력’을 내세운 이에야스는 천재적인 무장들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글: 최인한 한경닷컴 대표 janus@hankyung.com
그림: 이재근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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