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과 반복…화면에 수놓은 이미지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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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아트 선구자 박현기 작품전…2일부터 갤러리 현대에서 열려국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였던 박현기(1942~2000)는 평생 철학과 미학, 건축학에 푹 빠져 살았다. 예술을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식한 헤겔, 카를 마르크스, 메를로 퐁티 등 거장들의 생각에 공감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수료하고 건축과로 옮겨 졸업한 그는 대구에서 건축 인테리어 기획사를 차린 뒤 현대미술운동에 동참하며 행위예술과 비디오아트 등 전위적인 작업을 보여줬다.
1979년 상파울루, 1980년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일찍부터 국제적인 시야를 넓힌 그는 거친 필선으로 비디오 작업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스케치한 회화(드로잉)도 남겼다. 비디오아트는 물론 행위미술, 설치, 회화까지 아우른 셈. 그를 ‘영원한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이유다.2일 개막해 다음달 12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는 박현기의 개인전은 이런 그의 예술정신을 오랜만에 돌아볼 수 있는 자리다. 2010년 이후 7년 만에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1993~1994년 작업한 회화 20여점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면서 설치작품 4점도 내놓아 그의 비디오아트와 회화 세계가 어떻게 연관됐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박현기는 궁극적으로 ‘본다’는 행위 자체와 이미지의 중첩 현상을 시각언어로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자신이 태어난 일본 오사카의 갈대밭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 작품들은 오일스틱으로 모니터를 비롯해 나무, 돌탑 등의 특정 소재를 중첩하고 조합하면서 이미지를 재구성한 게 특징이다.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면에 숨어 있는 가치를 탐색하려는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고찰을 회화에 도입했다. 전시 제목도 퐁티의 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Visible, Invisible)》에서 따왔다.
색채도 적색, 청색, 황색, 녹색, 갈색 등으로 범위를 확장해 ‘절대적인 세계’를 잡아냈다. 일부 작품에는 너저분한 필선 사이로 ‘변증법’ ‘형이상학적’ ‘주민번호’ 등의 문자와 숫자를 집어넣어 의식의 흐름을 필터처럼 걸러냈다.동양의 선(禪) 사상과 서양의 테크놀로지의 융합을 통해 ‘바라보는 것’을 고찰한 설치작품도 나와 있다. 1997년에 만든 대표작 ‘만다라’는 비디오 영상에 충격적인 포르노 이미지와 음향, 불교의 만다라 형상을 교묘하게 짜맞춘 작품이다. 욕망과 갈등으로 물든 현대인의 복잡한 내면을 비추는 듯하다.
전시장 바닥에 철도 침목 60여개를 쌓아 놓고 벽에 하얀 캔버스 두 개를 설치한 ‘무제’는 사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일깨워준다. 자연석 사이에 TV 수상기를 끼워넣은 ‘비디오 돌탑’은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의 신명나는 만남을 보여준다.이번 전시를 기획한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박현기 선생은 에스키스(초벌그림) 회화와 비디오아트를 통해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첨단문화 사이에서 진짜 우리의 정체성이 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고 설명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