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왜?…20일 만에 꿈 접은 반기문 "내가 너무 순수했다"

대선 불출마 선언…결국 '고건 길' 따라간 반기문

지지율 급락·빅텐트 무산에 부인 유순택 씨도 포기 권유
"정치인 솔직한 사람 없더라" 충청 의원 등에 배신감 토로
1일 새벽 '대선 불출마' 결심
왼쪽사진-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왼쪽)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를 찾아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운데 사진-1일 오전 서울 여의도 바른정당 당사를 방문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정병국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른쪽 사진-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인사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기성 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대선 레이스를 접었다. 급속한 지지율 하락에 ‘빅텐트’ 무산, 내부 갈등, 부인 유순택 씨의 출마 포기 권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반 전 총장 측 설명이다.

한 관계자는 “기성 정치권의 벽은 높았고, 최순실 사태로 인해 대선이 급작스럽게 다가왔지만 자금과 조직 등 준비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 경험이 전무한 반 전 총장이 귀국 뒤 전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마타도어성 공격에 심적인 부담감을 여러 차례 토로했다”고 했다. 반 전 총장은 “오늘(1일) 새벽에 일어나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불출마) 발표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완주 의지를 드러냈던 반 전 총장은 기자회견에서 “일부 정치인의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는 지극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불신감을 드러냈다. 참모들에게 “정치가 정말 이런 건가. 너무 순수했던 것 같다”며 “정치인들은 단 한 사람도 솔직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했다. 또 “자꾸만 사람을 가르려고 하고, 당신은 ‘꾼’이 아닌데 (정치판에) 왜 왔느냐고 하더라”고 말했다.

발언 배경과 관련해 충청권 의원들이 반 전 총장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는 행태에 반 전 총장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 참모는 말했다.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라고 한 발언은 동생 반기상 씨 부자의 뇌물수수 혐의를 자신과 결부시킨 것과 ‘23만달러 수수’ ‘퇴주잔’ 논란 등을 둘러싼 각종 공세를 뜻한다.반 전 총장 측은 대선 중도 하차의 주요 이유로 준비 부족을 꼽는다. 반 전 총장은 예정대로 12월에 대선을 치른다면 1월 귀국한 뒤 준비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새누리당이라는 거여(巨與)를 기반으로 경선과 본선에 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최순실 사태로 인해 어그러졌다. 조직과 자금 등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사실상 빈손으로 귀국했다. 몸을 의지할 정당도, 강력한 정치세력도 없었다.

제3지대에서 중도-진보세력을 규합해 ‘빅텐트’를 치려고 시도한 것이 패착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념적인 방향성이 모호한 ‘진보적 보수’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 외면당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설 연휴에 제3지대 세력과 잇달아 접촉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국민의당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반 전 총장의 정체성을 문제 삼으며 연대에 부정적인 뜻을 나타냈다.

바른정당은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최후통첩을 했고, 새누리당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띄우며 반 전 총장과 거리를 뒀다.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겨울에 집을 놔두고 텐트를 치러 다니다 낙상할 수 있다”고 했다. 반 전 총장은 지난달 31일 ‘대선 전 개헌협의체 구성’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으나 차가운 반응만 확인했다. 갈수록 지지율이 떨어진 것도 불출마 결심을 하게 된 한 이유다. ‘사면초가’에서 결국 반 전 총장은 고건 전 총리의 중도 하차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