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 "교실 밖은 모르는 학생들 위해 창업·꿈 길라잡이로 뛰겠다"

"돈 없어 커피 팔던 서울대생, 과외로 매달 수억원씩 벌어"

인생 2막 여는 '사교육 대부'
365일 일하며 큰 돈 벌었지만 '죽을 때 부끄럽지 말자' 다짐
윤민창의재단 만들어 창업 지원

메가스터디그룹 리셋에 온힘

대학 간다고 삶이 행복할까
입시 중심의 교육은 곧 붕괴
틀에 맞춘 학습 방식보다 창의성 키우는 융합교육 관심을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과 얘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부조리(不條理)란 단어다. “삶은 곧 고통”이라는 게 손 회장의 지론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줄곧 해결하지 못한 채 붙들고 있는 인생의 화두”다. 그의 삶이 그랬다. 1987년 3월2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한신아파트에서 학생 여섯 명을 모아놓고 시작한 첫 과외 이후 30년간 ‘사교육의 대부’로 살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사교육 폐지론’을 누구보다 앞장서 외치고 다닌다. 한때 목사를 꿈꿨고, 실존주의에 매료됐던 ‘청년 손주은’이 사교육시장에 뛰어든 것 자체가 어쩌면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냉소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매 순간 삶의 이유를 찾고자 현실에 집중한다. 지난해 10월 윤민창의투자재단을 설립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교육으로 번 돈을 사회에 진 빚을 갚는 데 쓰겠다”며 사재 300억원을 출연했다. 한때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2조원을 웃돌던 메가스터디를 ‘부활’시키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입시에 매몰된 교육산업은 조만간 붕괴된다는 생각에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는 중이다.지난달 23일 서울 서초동 이담(怡潭) 한정식에서 그를 만났다. 이담은 ‘편안한 연못’이란 뜻이다. 대학 때 국문학을 전공한 경남 하동 출신 주인장은 ‘마음 편안한 자리’ 정도로 해석해 달라고 했다. 한국 교육의 현안부터 손 회장이 겪은 다양한 삶의 변주를 듣는 자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스타강사 출신인 그의 ‘입담’은 명불허전이었다. 세 시간가량 이어진 대화가 ‘벌써 끝났나’라고 느껴질 정도로 금세 지나갔다.

“메가스터디 부활에 힘 쏟을 것”

밖에서 식사할 일이 많아서인지 손 회장은 “한식을 즐겨 먹는다”고 했다. 이담은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올 정도로 단골이다. 자리에 앉자 삼색나물(고사리 시금치 무)을 비롯해 꼬막무침, 장아찌, 파래무침, 동치미 등 정갈한 밑반찬이 깔렸다. 집에서 담근 장류와 하동 인근에서 가져온 천연 재료만 사용한다고 했다. 겨울 장독대에서 갓 꺼낸 듯한 동치미 맛이 일품이었다. 밑반찬과 함께 나오는 제철 굴과 도미, 광어회도 입맛을 돋우는 데 그만이다.
근황을 묻자 손 회장은 “몇 년간 잘 놀았다”고 했다. 메가스터디를 매각하려다 값이 안 맞아 중단한 뒤로 경영에선 거의 손을 뗐다.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론은 결국 죽는 거예요. 떠날 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말아야겠다는 고민을 늘 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는 것이었다. 메가스터디그룹부터 ‘리셋’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대단했는데 제대로 못 키워서 창피하다”는 게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의 변(辯)이다. 메가스터디는 코스닥시장에서 주가가 38만5000원까지 치솟았던 기업이다. 시가총액이 2조5000억원을 웃돈 적도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입시시장이 위축되면서 사세도 기울어 지금은 시총이 3800억원 수준(메가스터디 메가스터디교육 메가엠디)으로 떨어졌다.손 회장은 “입시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완전히 새로운 걸 해볼 계획이에요. 교육기업이니까 교육을 중심 주제로 놔야겠죠. 여기에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관련된 것들을 어떻게 잘 결합할지를 공간적으로 풀어볼 생각입니다.” 손 회장이 메가스터디그룹을 탈바꿈시키려는 이유는 “입시 중심 교육이 끝나간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일본을 사례로 들었다. “일본은 10년 전부터 대형 학원이 대부분 없어지고 소규모 학원으로 바뀌었어요. 그나마 요즘은 작은 학원들마저 찾아보기 힘들게 됐죠.”

목사를 꿈꾸던 ‘청년 손주은’

“사교육으로 번 돈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는 손 회장의 소망도 이런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는 “이 약 먹으면 다 낫는다고 약을 팔았는데 약 먹고 나서도 환자의 병이 낫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아졌다면 약을 판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딸의 이름을 따 윤민창의투자재단을 설립한 건 사회에 진 빚을 갚기 위한 첫 단추다. 1기를 공모 중이고, 선정된 이들에게는 창업자금으로 5000만원씩을 지원할 예정이다. 손 회장도 맨손으로 시작해 기업을 일궜다. 그토록 경이로운 경험을 많은 청년이 할 수 있게 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다.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섬진강의 ‘보물’이 차례로 밥상에 올랐다. 섬진강 재첩을 넣어 끓인 국과 은어구이가 나왔다. 얘기는 어느새 손 회장의 유년 시절로 흘러갔다.

손 회장 지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극과 극이다. 부산 동성고 동문들만 해도 그를 ‘창원에서 전학 온, 선생님이 책 읽어보라고 시키면 얼굴이 빨개져 더듬거리던 친구’로 회상한다. ‘손사탐’(사회탐구를 가르치는 손 선생님)이라 불리며 수강생 수천명을 몰고 다니던 ‘강의의 귀재’라는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다. 손 회장은 “고2 겨울방학 2개월이 나를 송두리째 바꿔놨다. 이때 말문이 트였다”고 회상했다. 그의 삶에 첫 번째 변주가 시작된 시점이다.

경남 창원의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되기 위해 택했던 길은 오히려 손 회장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청년 손주은’을 바꿔놓은 계기는 심령대부흥회라는 개신교 행사였다. 고3에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 내내 교회에서 살았다. 하루종일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기를 반복했다. 손 회장은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나만의 존재감을 이끌어내는 게 교육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교육 시장에 뛰어든 계기도 우연에 가까웠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손 회장은 “교회가 신앙을 박제화하려 한다”는 치기 어린 회의에 목사의 꿈을 접은 상태였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지만 1주일 만에 손을 들었다. 어느 날 아내가 수중에 3만원밖에 없다고 털어놨다(손 회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 재학 시절 결혼했다). 당장 돈이 필요했다.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2월 말 열린 서울대 졸업식에서 커피를 팔았다.

‘커피팔이 서울대생’ 얘기는 일파만파로 퍼졌다. “어느 날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아주머니가 부르더라고요. 그렇게 돈이 급하면 과외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과외는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아파트 한 동에서 한 집 걸러 하나씩 과외를 할 정도였다. 그날 이후의 ‘스토리’는 널리 알려진 성공 신화의 연속이다. 손 회장은 “정말 미친듯이 일만 했고 한 달에 수억원씩 벌었다”고 했다. 이를 토대로 2000년 메가스터디를 창업했다.

‘빈손교회’에 담긴 의미

손 회장은 의사로 치면 임상 경험이 풍부한 전문의다. “그동안 가르친 학생이 족히 100만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많이 아는 만큼 현 교육 시스템에 누구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가는 곳마다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융합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학 진학의 사회적 효용성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직 입시 중심 교육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종의 의식 지체라고 봐야죠. 불안해하는 학부모의 심리와 이를 이용하는 사교육 기업의 전략이 맞물린 결과죠.”

손 회장은 교실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꼭 배워야 할 교과를 정해놓고, 이를 중심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체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도처에 지식이 널려 있는데 학교에서 억지로 지식을 머리에 넣어주려 할 필요가 있느냐”며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자유롭게 토론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요즘 연로한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예전에 살던 집을 교회로 개조해 ‘빈손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목사인 두 여동생을 포함해 오롯이 가족만을 위한 공간이다. “절대적 질서라는 것 자체를 신(神)이라고 한다면 왜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느냐는 의심을 떨칠 수 없는데 아직도 답을 못 찾고 있습니다.”

인터넷 강의의 선구자…100만 회원 시대 처음 열어

메가스터디는 TV홈쇼핑 채널을 보던 손주은 회장이 떠올린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인터넷 강의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입시교육이 온라인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다는 게 손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2000년 7월 자본금 3억원으로 인터넷 교육업체 메가스터디를 설립했다. 스타강사를 대거 내세운 온라인 강의로 인기를 끌었다.

2004년 코스닥시장에 상장했고 2005년에는 회원 100만명을 넘어섰다. 2006년 엠베스트교육을 흡수합병하는 등 몸집을 키웠다. 2015년 4월 인적 분할을 통해 메가스터디와 메가스터디교육으로 분리됐다. 메가스터디는 메가엠디, 김영편입학원, 메가인베스트먼트, 메가F&S 등 계열사 14개를 거느리고 있다. 메가스터디교육은 계열사가 없다.
■ 손주은 회장의 단골집 이담
화학조미료·냉동 식자재 안 써…정성으로 차린 한정식

2002년 서울 역삼동에 문을 연 이담은 2015년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화학조미료와 냉동 식자재를 쓰지 않고 ‘집에서 먹는 밥’ 같은 음식을 차려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식자재 본연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최소한의 간만 해 담백한 맛을 살려내는 것이 이 식당의 특징이다. 음식에 사용하는 식초, 간장 및 각종 장류는 물론 장아찌 등도 모두 직접 담근다. 재첩, 은어, 대합 등 주된 식자재는 모두 섬진강에서 나는 것을 쓴다. 채소는 사장의 친척이 운영하는 지리산 농장에서 기른 것만 사용한다.정갈하고 깔끔한 음식 맛으로 입소문이 나 전·현직 고위 관료와 대기업 임원 등의 단골이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동휘/임기훈/성수영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