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무언의 약속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 >
얼마 전 한 지인에게서 사립미술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분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미술관 설립과 운영에 관한 상담이 끝나자 그가 이렇게 부탁했다. “솔직히 제가 미술관 설립자 자격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습니다. 예비미술관 설립자에게 관장님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술관 부지와 건물, 소장품, 학예사, 사무실, 교육실 등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른 등록 요건만 갖추면 미술관 설립자 자격이 주어지긴 합니다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컬렉션 성격과 방향을 고려한 미술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전과 목표가 있어야겠죠. 설립 취지 및 목표, 실천과제, 운영자금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고 시작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끝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어떤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폐관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그 힘은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그의 표정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고 이를 읽은 나는 경험담을 들려줬다. 개인이 비영리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미술관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문을 닫고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 정신적, 금전적 희생에 따른 대가가 작다는 세속적인 계산을 하게 된다.나 역시도 이런 위기의 순간을 여러 번 겪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가 없었다면 오래전 폐관을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작가와 관객에게 한 무언의 약속을 지키는 책임감을 말한다. 작가에게는 전시경력이 무척 중요하다. 어느 미술관에서 전시했는지는 작가의 주요 이력이 된다. 미술관 폐관은 작가의 전시 경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미술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관람객에게서 문화공간을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미술관을 설립하기도 어렵지만 없애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에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고 조언했고 그는 큰 숙제를 안고 돌아갔다. 그가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 savinalectur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