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전기차도 100년 전 기술…"꺼진 생각도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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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씽크
스티븐 풀 지음 / 김태훈 옮김 / 쌤앤파커스 / 400쪽│2만2000원
19세기 말 런던 거리 달린 전기차
휘발유차에 밀려 사라졌지만 100년 만에 미래형 자동차로 부활
"무에서 유 창조만이 혁신 아냐, 재고·재발견이 신기술 이끌어"

하지만 10여년 뒤 전기차는 서서히 줄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췄다.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휘발유값이 급락했고, 헨리 포드는 전기차의 절반 가격에 휘발유차를 내놨다. 휘발유차가 주행거리와 속도, 성능 면에서 전기차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20세기를 주름잡은 건 휘발유차였다.다시 100여년 뒤 전기차는 거리에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혁신의 아이콘’ 엘론 머스크가 전기차를 ‘재발견’하면서다. 머스크는 2008년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 첫 전기차 로드스터를 내놨다. 한 번 충전으로 320㎞를 달릴 수 있는 차였다. 이어 내놓은 모델S는 2015년까지 연평균 5만대 팔렸고, 올 하반기 본격 출시되는 보급형 모델3는 지난해 사전 예약 개시 1주일 만에 32만5000대(140억달러)가 판매됐다.

중세와 초기 근대 유럽에선 피를 뽑아내는 사혈(瀉血) 치료가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사혈의 주요 도구는 거머리였다. 19세기 모든 질병이 내장의 염증에서 기인한다는 한 의사의 이론에 따라 유럽 전역에서 거머리 요법 열풍이 불었다. 색정증(色情症)부터 결핵까지 모든 병에 이상적인 치료법으로 거머리를 이용한 사혈이 동원됐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거머리 요법은 원시적이고 비위생적이며 비과학적인 의학의 혐오스러운 역사로 치부됐다. 그러다가 몇몇 의사가 거머리 요법을 재발견했다. 수술 후 혈액 응고 방지와 혈액 순환, 혈관 재결합에 거머리를 활용해 성공한 사례가 잇따르면서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은 거머리를 ‘의료기구’로 공식 승인했다. 거머리 요법은 접합 수술, 피부이식, 재건성형 수술에 자주 사용된다.
저자는 오래된 아이디어의 재발견과 개선으로 촉진되는 혁신의 다양한 사례를 살핀다. 그렇다고 16세기 과학혁명 이전에 지식사를 바라보는 지배적 관점이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기계식 시계, 망원경, 나침반, 뉴턴의 중력이론 등 때로는 태양 아래 실로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저자는 다만 뉴턴 이후로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혁신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현재 새로움과 단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가 형성됐다고 지적한다. 혁신은 무조건 독창적이고, 유례가 없으며, 과거로부터 급격한 단절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이를 ‘실리콘밸리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그는 “혁신이라는 개념이 이단아 같은 젊은 기업가가 번뜩이는 영감을 토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세상을 바꾸는 식으로 협소해지면 과거를 재고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머스크는 한동안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한 ‘단절(disrupt)’이란 단어에 대해 “나는 단절을 좋아하지 않으며 기존의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저자는 “창의성은 그동안 간과된 아이디어의 가치를 깨닫는 능력일 수도 있다”며 “재고와 재발견의 기술은 권위, 지식, 판단, 옳고 그름, 생각 자체의 절차에 대한 우리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