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26)] 조천일우 차즉국보

원철 < 스님 (조http://wcms.hankyung.com/apps.news/news.view?aid=2017030168921&type=media&mediaid=AA&startdate=20170302&pagenum=33#계종 포교연구실장) >
이 한시는 일본 교토 인근 히에이(比叡)산 엔랴쿠지(延曆寺)의 후문 방향 주차장 가는 길에 있는 돌기둥에 세로글씨로 새겨졌다. 석조물 자체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이끼도 끼지 않았고 물때도 없으며 색깔도 바래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원문까지 요새 것은 아니다. 이 절을 처음 지은 사이초(最澄·767~822) 대사의 어록인 까닭이다. 궁궐처럼 화려한 도시 사찰에 머무는 것을 당연시 여기던 시절에 그런 식의 삶을 거부했다. 22세(788년) 때 깊은 산을 찾아가 토굴을 짓고 고행을 자처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손수 제작한 불상과 그 앞의 소박한 접시등잔에 불을 밝혔다. 사바세계의 수많은 어두운 구석 가운데 이렇게 한 구석(一隅)이라도 제대로 밝힐 수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사이초 대사는 804년 중국으로 유학해 저장(浙江)성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머물렀다. 그곳은 전설적 은둔자 한산(寒山)이 나무와 바위에 아무렇게나 써두었다는 시를 모은 《한산시집(寒山詩集)》의 무대이기도 하다. 5번 시에 ‘언제나 저 뱁새를 생각하노니 한 가지만 있어도 몸이 편안하다네(常念鳥 安身在一枝)’라는 구절이 나온다. 많은 나무가 있어도 뱁새에겐 한 가지(一枝)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우연의 일치로 ‘일지(一枝)’와 ‘일우(一隅)’는 천태산이라는 지역적 배경을 함께한 셈이다.

‘일지’는 조선 초의 선사(1786~1866)에 의해 전남 해남의 작은 암자인 일지암(一枝庵)까지 뻗쳤다. 한동안 끊어진 다맥(茶脈)을 되살리자 차 향기는 다시 한반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나뭇가지 한 개가 드디어 천 가지(千枝)가 된 것이다. 또 ‘일우’ 등잔불은 오늘까지 천년 이상 이어져 ‘불멸의 등불’로 불렸다. 동시에 일본열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등잔불 한 심지가 다른 심지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천 구석(千隅)을 밝힌 것이다. 결국 사이초 대사의 ‘일우’ 등잔불과 초의 선사의 ‘일지’ 암자는 두 나라의 보배가 됐다.

원철 <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