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중공'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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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기습 참전…한반도 유린했던 중국“우리들의 가정과 나라가 크나큰 위험(great danger)에 처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미·중 간 교전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15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전국에 중계된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가비상사태(State of National Emergency)’를 선포했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때도 발동하지 않은 조치였다.
북한 감싸면서 한국 '사드' 협박·조롱
추락하는 자존감, 그냥 두고봐야 하나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기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미군과 한국군이 기습 참전한 중공군(정식 명칭은 인민해방군: ‘중공’을 약칭으로 삼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당의 군대. 중국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군대, 즉 중국군은 없다)에 허를 찔렸다. 순식간에 200㎞ 가까이 밀려 내려왔다.세계 각국의 군사학교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을 궤멸)와 함께 ‘동계전투의 2대 교본’으로 꼽는 장진호 전투가 이때 벌어졌다. 1950년 11월26일 밤, 개마고원 장진호 부근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 8개 사단 12만명이 개미떼처럼 미군을 덮쳤다. 10배가 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막힌 미군은 낮엔 영하 20도, 밤엔 영하 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酷寒) 속에서 사투를 벌였다. 1만4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포위망을 뚫기까지 17일이 걸렸다. 2주 넘게 중공군을 막아내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북한 주민 20만여명이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피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기세는 달아올랐다. 38선 남쪽까지 내려온 중공군에 대한민국은 다시 서울을 빼앗겼고, 평택까지 밀려났다.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영연방군이 벌인 가평 전투, 프랑스군 600여명이 중공군 3만명을 무찌른 양평의 지평리 전투, 태국 왕실근위대원들이 지켜낸 연천 고지전(高地戰) 등 덕분에 전세(戰勢)를 뒤집고,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 전선(戰線)을 형성하기까지 반년 가까이 혈전을 치렀다.
‘중공’이 이끄는 중국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의 적국(敵國)으로 남아 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중국은 중공군 투입으로 인해 한반도 분단과 대립을 고착화시켰다. 그런데도 어떤 형태로든 사과한 적이 없다. 그 반대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부주석 시절이던 2010년,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참전을 미화해 국제적 물의를 일으켰다. 서울에 관광 온 중국 참전 군인들이 “60여년 전에는 여권이 아닌, 홍기(紅旗)를 들고 서울에 왔었다”며 시시덕거리는 장면을 중국 TV에서 대놓고 방영할 정도다.
한국의 자업자득이다. 중국 측에 이 심각하고 중요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요구한 적이 없다. 일본에 대해서만 과거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뿐이다. 1992년 중국과 국교를 맺을 때도 그냥 넘어갔다. 중국이 알아서 사과해 줄 리 만무하다. 할 말을 못 하는 나라니, 더 우습고 만만해 보일 뿐이다.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대하며 한국을 마음껏 겁박하고 있는 게 그 증좌다. 중공 기관지 환구시보는 ‘한국은 미국이 중시해주니 좋은가’라는, 제목부터 유치한 사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바둑알로 전락했고, 두고두고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대놓고 조롱했다.이런 모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게 한국 정부와 정치권의 반응이다. 북한 정권이 ‘혈맹’ 중국의 보이지 않는 뒷받침이 없다면 핵이나 미사일 개발은커녕, 존립이 어렵다는 건 뻔한 사실이다. 60여년 전 이 땅을 침략했고, 사드를 불러들인 원인 제공자가 중국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할 말을 에두르고 있고, 야당은 중국 박자 맞춰주기에 바쁘다. 대한민국의 자존감이 추락하고 있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