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책이 아닌 '취향'을 산다…대학가 서점의 이유있는 부활

아날로그 감성 자극 독립서점 증가세
상업성보다 '문화·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조아라 기자 ] "이 책은 여기서만 팔아요."

서울 마포구 아현 재정비촉진지구 후미진 골목의 상가 건물 1층. 간판도 없는 한 가게 앞에 맥주와 와인병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지난 2일 이 가게 앞에서 만난 이대생 윤지원 씨(21)는 "예전에 우연히 이 책에 실린 글귀들을 읽었는데 너무 좋아 구매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윤 씨가 산 책은 〈엄마는 50시〉로, 정기웅 작가가 10년간 자신의 엄마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엮은 책이다. 작가가 직접 제작·인쇄했다.이 곳의 정체는 술과 책이 함께 있는 서점을 표방한 '퇴근길 책 한 잔'이다. 가게에 들어서자 긴 탁자부터 눈에 띄었다. 책들이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대여섯 개의 의자가 놓였다. 벽 쪽 책장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런데 뭔가 낯설었다. 대형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술과 책이 있는 독립출판물 전문서점 '퇴근길 책 한 잔'
'퇴근길 책 한 잔'의 주인 김종현 씨(35)는 "꼭 책방을 열려고 했던 건 아니다. 흘러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으니 다음 달이면 2년을 채운다"라며 웃어보였다. 그는 "가게 이름처럼 책과 술을 같이 판다. 종종 손님들과 함께 한 잔 한다"고 귀띔했다.

책들이 낯선 이유가 있다. 이곳은 독립출판물 전문서점이다. 판매하는 책들은 소규모 출판 또는 작가 본인이 직접 출판한 케이스가 많다. 일반 출판사에서 펴내 대형서점에 입고되는 책보다는 '입고되지 못하는 책', '출판물로 등록되지 않은 책'이 많다. 주인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됐다.같은날 찾은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 앞 뒷골목 인적이 거의 없는 상가 건물 1층에도 독특한 서점이 자리헸다. '미스터리 유니온(Mystery Union)'이라고 쓰인 중세 유럽풍 깃발이 펄럭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 서가에 각종 서적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이 서점의 테마는 추리소설 전문서점이다. 지난해 7월 오픈했다.
추리소설 전문서점 '미스터리 유니온'
미스터리 유니언의 주인은 과거 광고대행사에서 일했다. 추리소설을 좋아해 전문서점을 열었다. 그는 "인근에 출판사들이 많은 데다 비교적 저렴한 월세, 분위기 등을 고려해 장소를 선정했다"고 소개했다. 문을 연 지 채 1년도 안됐지만 꽤 유명세를 탔다. 손님도 20~30대부터 40~5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최근 1~2년 사이에 이 같은 독립서점과 테마 전문서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작년 4월에는 음악도서 전문서점인 '초원서점'이 마포구 염리동에 문을 열었다. 5월과 6월에는 각각 그림책과 시집 전문서점 '노란 우산'과 '위트 앤 시니컬' 이 개점했다. 신촌을 중심으로 마포구와 서대문구의 대학가에 들어선 이름이 알려진 독립·테마서점만 해도 20곳이 넘는다.
시 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종이책과 서점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추세를 감안하면 의외의 현상이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국내 전체 서점 수(문구점 겸업 포함)는 2116개로 10년 전(3429개)에 비해 38.3% 줄었다. 도서만 판매하는 순수 서점의 경우 1559개로 2013년 말 대비 66개(4.1%) 감소했다.

이유가 뭘까. 우선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 독립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적 가운데는 신간도 있지만 20~30년 전 출판됐거나 절판된 중고 서적도 섞여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한다.

일반 서점과 차별화된 점도 인기요인이다. 주인과 방문객이 함께 즐기고 소통하는'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독립서점들은 대부분 시인이나 작가, 음악가 등을 초청해 낭독회, 정기적 모임 등을 열어 주인과 방문객들의 소통이 활발하다. 끈끈한 공감대 형성은 덤이다.
시 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방문객들은 '맞춤형 책' 추천도 받을 수 있다. 서점 주인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서점을 꾸미고 책들을 진열해 놓곤 한다. 각각 다른 매력을 어필하는 셈. 대중적 취향을 반영해 베스트셀러 위주로 진열하는 대형서점보다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독립서점을 방문한 이대성 씨(61)는 "주인의 개성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취향을 잘 선별해 진열했다"며 "주인에게 책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배우고 느끼는 게 많다"고 전했다.

또다른 요인으로 지난 2014년부터 시행된 도서정가제를 꼽을 수 있다. 높은 할인율을 무기로 중소형 서점과 출판사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형 출판 유통사의 공세를 막는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작은 서점들이 좀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대부분 독립서점 주인들은 수익성을 후순위로 둔다고 했다. 좋아하는 분야와 취향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월세와 운영비 정도는 벌어야 해 책 판매 외에 음료를 함께 팔거나 다양한 행사를 열어 수익을 내는 구조다.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는 "독립서점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어느 서점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가기보다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서점에 가는 것 같다. 보통 외진 곳에 있는 독립서점을 방문할 정도면 '적극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풀이했다.그는 "다만 독립서점이 충분한 관심을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서점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입소문 대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나만의 서점'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사람들은 책이 아닌 '취향'을 사고 있었다.

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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