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문화의 자주권을 선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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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문화를 손볼 수 있다는 그릇된 인식한국의 문화정책이 총체적 위기에 처했다. 작년 가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가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것은 이번 정권에 국한된 사례는 아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금도를 넘은 사실이나, 역대 정권에서 코드에 맞는 인물들이 문화권력을 독점하고 낙인 찍힌 인사들을 보이지 않는 ‘체’로 솎아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영혼은 없이 허울뿐인 싸구려 발상 양산
정권 따라 흔들리지 않는 문화플랜 제시를
김성도 < 고려대 교수·언어학 >
무엇이 문제의 근원인가. 정치권력이 문화를 인식하는 그릇된 태도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영역을 손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고질적인 억견(doxa)이 권력자들의 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문화가 정치권력에 예속됨으로써 야기되는 비극은 도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당장, 광주의 아시아문화전당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생각해보자. 이 두 곳은 모두 거의 문화적 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국세를 들여 지은 건축물과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생산된 콘텐츠 수준, 국민의 사용 빈도에 기초한 문화예술의 공공성, 문화산업 차원에서의 경제적 효과와 국제적 인지도와 영향력 등 모든 측면에서 성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 이른 근본적 원인 중 하나는 정권 교체 때마다 최초의 비전과 계획을 수시로 변경하면서 문화정책의 단절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업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검증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한 것도 한몫했다.
작년 여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을 방문했는데 방문객이 적어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DDP는 어떤가. 쇼핑시설을 목표로 하는 영리 추구 공간인지, 시민을 위한 비영리 복합 문화공간인지 알 길이 없을 정도다. 디자인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그럴싸한 슬로건으로 국민을 현혹한 제작자들은 무슨 목표 의식을 갖고 이 공간을 만들려고 했는지 울분마저 치솟는다.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총체적 인간 활동과 창의적 아이디어의 집적체라는 점에서 특정 공간에서 디자인을 연구하거나 생산한다는 아이디어는 전형적인 탁상공론의 후진국적 발상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20세기 문화정책의 전범이며 세계 복합문화예술공간의 메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지난달 초 개관 40주년을 맞았다. 40년의 세월 동안, 퐁피두센터에 대한 종합평가는 프랑스를 넘어 세계에서 현대문화 창조에 결정적 역할을 맡으며 일종의 ‘퐁피두 효과’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 현대문화예술의 명소는 인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던 조르주 퐁피두가 1969년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구상한 공간이다. 개관 당시에는 너무나 생소한 건축물로 인해 ‘탈(脫)현대성’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다양한 예술적 표현들의 만남의 장소 창출이라는 유토피아적 모델은 오늘날까지 고수되고 있다. 현대예술의 걸작들을 소장한 미술관을 비롯해 모든 시민에게 열린 정보도서관(BPI), 영화관, 공연무대, 첨단의 전위음악 연구소 외에도 인문지식, 예술, 테크놀로지, 실천의 창발적 융합공간으로서의 산업창조센터(CCI)가 자리잡고 있다.50여년 전 정치지도자가 이 같은 창의적 문화복합공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문화 대통령’ 퐁피두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주목할 사실은 퐁피두센터는 지난 반세기 동안 프랑스의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최대한 자율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프랑스 정부는 퐁피두센터 전체 예산의 58%에 육박하는 1억3500만유로를 지원했다. 퐁피두센터는 6개의 지방 분점을 개관했는데 그중 하나가 2010년 개관한 퐁피두-메츠다. 이곳은 문화의 탈중앙집중화와 지방 문화정책의 자율성 부여라는 프랑스 문화정책이 장기적 전략 속에서 실현한 성공 사례로 회자된다.
퐁피두 사례는 정치권력의 추가 좌우로 이동할 때마다 문화가 제일 먼저 ‘먹잇감’이 되는 한국의 서글픈 실정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제 새 정권에서 어떤 문화정책보다 먼저 할 일은 문화의 주권과 자주권을 선언하고 보장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 구체적 행동플랜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김성도 < 고려대 교수·언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