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열여덟 살 한국 병사는 왜 노르망디까지 끌려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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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7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지음 / 김규태·박리라 옮김 / 글항아리 / 1288쪽│5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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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앤터니 비버는 2013년에 펴낸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자비한 역사적 폭력 앞에 믿기 힘들 만큼 기구한 운명을 겪은 한 개인의 이야기를 화두로 꺼낸다. 이는 비버가 1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써내려간 대서사의 특징을 드러낸다. 2차대전을 다룬 다른 저작들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저자는 다른 역사가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거나 간과한 소련과 일본, 중국 간 분쟁과 갈등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과 전투가 유럽과 태평양 등 전쟁이 벌어진 전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역사서처럼 2차대전의 서술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이보다 한 달 전 만주에서 소련과 일본이 맞붙은 대규모 전투로 시작한다. 양경종이 관동군으로 참전해 소련군 포로로 잡힌 할힌골 전투다. 이 전투에서 소련은 일본에 대승을 거둔다. 저자에 따르면 이 전투의 결과는 일본이 북벌보다 남벌에 힘을 쏟게 되고 미국이 참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소련도 시베리아 군대를 서부로 돌려 독일군을 상대하게 했다.
저자는 연대기적 서술로 전쟁의 거의 모든 주요 전장과 사건, 인물을 아우르며 정치적 배경과 전략, 역사적 동인들을 꼼꼼하면서도 균형감 있게 설명한다. 이와 함께 대량 학살, 강간, 생체 실험 등 포로나 민간인, 여성에게 행해진 끔찍한 만행을 가감없이 기록하며 전쟁의 광기와 공포, 잔혹함, 야만성, 비현실성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이 전쟁이 휘두른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삶이 망가진 일반 병사와 시민의 운명도 놓치지 않고 묘사한다. 저자의 말대로 “양경종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저자는 전쟁으로 사회가 붕괴되고 살인이 쉽게 이뤄질 때 인간의 도덕성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그런 때에 인간의 풍부한 창조력은 상상하기 힘든 가학 행위와 대량 학살에도 발휘된다. 전쟁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이 책의 부제처럼 제2차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였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