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후보야? 보수 후보야?…헷갈리는 대선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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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 너도나도 '산토끼 잡기'“국민기초생활보장 수혜 대상을 차상위 계층까지 확대하고 횡령·배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는 사면을 금지하겠다.”
문재인, 법인세 인상에 '신중'
안희정 공약 '작은 정부론' 가까워
보수 유승민, 가장 진보적 공약
남경필도 진보 정책 대거 수용
한 대선주자가 내놓은 공약이다. 복지를 확대하고 재벌 총수를 엄벌하겠다는 내용으로 미뤄봤을 때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 소속 후보가 내놓은 공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공약의 주인공은 보수 정당인 바른정당 소속 유승민 의원이다.이번 대선은 국회 의석을 가진 정당만 다섯 개나 되는 다자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보수, 중도, 진보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하다. 하지만 대선주자들이 내놓는 공약만으로는 누가 보수 진영 후보이고 누가 진보 진영 후보인지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재벌개혁, 기초연금 인상, 아동수당 도입 등을 공약했다. 여기까지는 민주당이 추구해 온 정책 방향과 일치한다. 그러나 문 전 대표는 법인세 인상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비과세·감면을 줄여 실효세율은 높이되 명목세율 인상은 추후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간 민주당이 법인세 인상을 주장해 온 것과는 결이 다르다.
민주당 소속 안희정 충남지사는 보다 적극적으로 중도·보수층을 파고들고 있다. 안 지사는 “정부 주도가 아니라 시장 중심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보수가 주장하는 ‘작은 정부론’에 가깝다. 또 노동유연성과 근로자 복지를 동시에 실현하겠다고 했다. 문 전 대표가 군 복무 기간 단축을 공약한 것과 달리 안 지사는 “표를 의식한 공약”이라며 군 복무 기간 단축에 반대하고 있다.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공정거래위원회 기능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취업 청년에게 월 5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등 경제 분야에선 진보에 가까운 공약을 내놓았다. 반면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를 조기 전력화하고 국방 예산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등 안보 분야에선 보수 성향을 보이고 있다.
유 의원은 보수 정당 소속이지만 복지·노동 분야 공약은 대선주자 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연금 최저액 월 80만원까지 인상 △대기업·공공기관 비정규직 채용 금지 △최저임금 시간당 1만원까지 인상 등이 그가 내놓은 공약이다.
바른정당 소속 남경필 경기지사도 진보 진영이 주장하던 정책을 대폭 수용했다. 남 지사는 △모병제 도입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청와대·국회·대법원 세종시 이전 등을 공약했다.대선주자들이 ‘크로스오버 공약’을 내놓는 것은 집토끼(전통 지지층) 외에 산토끼(상대방 지지층)까지 잡으려는 전략으로 정치권에선 보고 있다.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이 파면당한 뒤 치러지는 대선에서 보수 성향 정책만으로는 표심을 얻을 수 없다는 후보들의 판단이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또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임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어 상대 진영을 끌어안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