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보가 형, 놀보가 아우…유쾌한 비틀기에 '웃음 폭탄'

내달 5일 개막 창극 '흥보씨' 연습현장 가보니…

고선웅 연출의 야심작…소리꾼 이자람과 협업무대
'말하는 호랑이' 등 캐릭터 추가해 긴장·재미 살려
유태평양 '강남 제비' 역…배우들 코믹연기에 폭소
국립창극단의 신작 ‘흥보씨’ 전체 리허설이 열린 23일 흥보 역 김준수(왼쪽)와 ‘별에서 온 스님’ 역의 조유아가 손가락을 맞댄 채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아이고 여보 마누라, 차라리 내가 죽을라네!”

23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연습실. 흥보가 부채를 높이 쳐들고 배를 찌르는 시늉을 하는 순간, 신시사이저 소리와 함께 이상한 복장을 하고 가부좌를 튼 스님이 등장한다. ‘화성과 금성을 왕래하는 걸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님이 유난히 기다란 검지를 흥보의 검지에 갖다 대자 번쩍번쩍 불이 들어온다. 흥보가 말한다. “으미 썬뜩한 거, 스님이 입도 없네, 먹지 않고도 살어요? 욕심을 버려요? 그러면 이 지상의 감옥을 떠날 수 있어요?”
고선웅 연출가
‘흥보전’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다음달 5~1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흥보씨’다. 기발한 연출력과 섬세한 필력으로 정평이 난 고선웅 연출이 극본·연출,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아 상반기 기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첫 전체 리허설을 한 이날, 고 연출 특유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걸쭉한 소리를 뽑아내는 배우들의 연기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놀보 역 최호성의 악독한 표정 연기는 일품이었고, 흥보 역 김준수는 소리에서조차 ‘선함’이 묻어 나왔다. 공연을 지켜보던 이자람 음악감독은 연신 “어이” “잘한다” 등의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웠다.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인데도 고 연출의 손길을 거치니 진부하지 않고 유쾌하다. 특히 1막에서 ‘거지 소굴’ 장면은 극의 백미다. 흥보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소박맞은 여자 정씨를 구해 거지 소굴을 지나간다. 착한 흥보는 거지들을 모두 거둬 자신의 자식으로 들여 거지춤을 추며 일렬로 나가는데, 늙은 거지가 등장해 “고만 떠돌고 얹혀 살아볼라요. 거두어주소, 아버님”이라며 흥보에게 넙죽 절을 한다. 특별 출연하는 소리꾼 윤충일(83)이다. 그가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며 각설이 타령을 신명나게 부르자 배우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극의 제목인 흥보씨(Mr. Heungbo)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선한 사람’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고 연출은 “살면서 늘 ‘착한 사람은 정말 늘 손해를 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흥보씨를 통해 ‘착해도 손해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비틀기의 대가’답게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살리면서도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추가해 재미를 더했다. 원래 흥보가 형이고, 놀보가 아우였다는 출생의 비밀부터 시작해 ‘다른 별에서 온 스님’ ‘말하는 호랑이’ 등의 캐릭터를 추가해 극적 긴장감과 재미를 더했다. 유태평양이 맡은 ‘제비’는 새가 아니라 사모님들의 남편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진 ‘강남 제비’로 표현했다.극 중 흥보는 부처인 듯, 예수인 듯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외계에서 온 스님’으로부터 ‘공(空) 사상’을 배우는가 하면, 소작쟁의로 관가에 끌려갈 처지에 놓인 놀보 대신 곤장 50대를 맞는 장면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다. ‘박 타는 장면’은 아주 창의적인 방식으로 극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비워야 하리 텅텅텅 그때서야 울리리 텅텅텅”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구절은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이 음악감독은 판소리 ‘흥보가’ 원형을 토대로 하면서도 자유자재로 음악을 변주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전통 국악기에 샌드박스, 귀로, 템플블록 등 다양한 타악기를 실험적으로 활용했다. 1막에 등장하는 ‘쟁기질 노래’는 이국적인 느낌까지 준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