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족의 탄생…급변의 시대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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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콘텐츠‘안방극장’으로 불리는 TV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요즘 그 거울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달라지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KBS) ‘아빠! 어디가?’(MBC) 등이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는 시대에 남성 육아의 필요성을 환기하며 인기를 끌었다면 ‘미운 우리 새끼’(SBS), ‘나 혼자 산다’(MBC) 등은 늘어나는 ‘비혼족(非婚族)’과 1인가구의 삶을 내밀하게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얻고 있다.
노년에 살림 배우는 '졸혼남' 백일섭…37세 이천수와 94세 어르신의 동거
달라지는 가족상 TV에 다있네
'미운 우리 새끼' 등 비혼족·1인가구 삶 공감
변화하는 가족 보여주는 예능·드라마 인기
◆70대 백일섭의 새로운 시작, ‘졸혼’KBS 예능 프로그램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바깥일을 한다는 편견을 깨고 집에서 살림을 하게 된 이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배우 백일섭(73)은 아내와의 ‘졸혼(卒婚)’을 선언한 경우다. 졸혼은 ‘혼인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법적 절차를 거치는 이혼과는 다르다.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2004년 쓴 소설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등장했다. 백일섭은 “서로 예의를 지켜가며 정답게 살면 같이 사는 게 좋지만 나는 성격상 그럴 수가 없었고, 이제 다시 돌이킬 수도 없다”고 졸혼을 선택한 이유를 고백했다. 40년 동안 함께 산 집은 아내에게 선물하고, 혼자 집을 얻은 그는 현재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매달 200만원에 달하는 쌍둥이 손자의 보모 비용도 자신이 책임질 정도로 가장의 역할은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
방송은 ‘졸혼남’ 백일섭의 홀로서기 과정을 그린다. 여기저기서 얻어온 반찬과 즉석조리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던 그는 좀 더 제대로 살기 위해 요리를 배우기로 결정한다. ‘웃픈(웃기면서 슬픈)’ 장면도 자주 나온다. 요리연구가 심영순 씨를 찾아가 “밑반찬 같은 건 며느리가 사다 주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기본적으로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쯧쯧, 얼마나 세월이 짧은데 아내와 떨어져 혼자 있느냐”는 핀잔만 들었다. 그래도 백일섭은 예전 같았으면 숨겼을 가족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노년에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세대차를 뛰어넘는 ‘新가족’지난달 15일과 22일 방영한 KBS 2부작 다큐멘터리 ‘행복한 노홀로집’은 초고령 노인 1인가구의 행복한 일상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형식이 독특하다. 축구 경력 86년을 자랑하는 ‘일반인’ 오진영 씨(94)와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천수(37)가 동거를 한다. 동네 할아버지들과 축구 시합을 함께한 이천수는 “94세 어르신이 골 넣는 것은 처음 본다”며 놀라고, 오씨는 전 국가대표와 경기를 한다는 사실에 행복해한다.
세대가 달라도 한참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배려하고 맞춰가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기상 시간이 달라 서로에게 방해가 될까봐 두 사람은 오전 8시에 기상하기로 약속한다. 이른 새벽에 잠을 깬 할아버지는 조용히 이천수를 기다리다가 그를 위해 아침밥을 준비한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평범해서 위대한 보통사람들
SBS 시트콤 ‘초인가족’은 1인가구가 늘어나면서 미디어에서 소외됐던 평범한 가족들의 모습에 다시 집중한다. 작은 주류(酒類) 회사의 ‘만년 과장’ 나천일(박혁권 분)과 목소리 큰 그의 아내(박선영 분), 얄미운 중2 외동딸(김지민 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소한 이야기를 다룬다. 허구한 날 승진에서 밀리는 아버지, 쪼들리는 살림에 할인 행사만 찾아다니는 엄마, 외모도 성적도 중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의 일상에 과장과 패러디를 더해 경쾌하게 그려낸다. 내용은 한없이 소소하다. 엄마는 지인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고 우울해지고, 아빠는 딸과 소통하기 위해 신조어와 랩을 배운다. 황금 같은 주말 부사장과 함께 낚시를 하다 날아오는 생선을 얼굴로 막아내는 직장인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 평범한 가족이 왜 ‘초인가족’일까. 제작진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초인(超人)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평범한 가정이 소중한 것이라고 말이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