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쟁력 가로막는 '혁신의 덫'…M&A로 신성장동력 찾아야"

CEO를 위한 경영학 인수합병과 혁신경쟁력

과도한 핵심사업 성과 집착으로 근본 목적의식 잃고 혁신 위축

첨단기술산업에서 인수합병은 기술변화에 효율적인 대응 기법
기업 지배구조 바꾸는 역할도

혁신 유도하고 경쟁력 높이려면
경영진과 투자자간 감시·견제 등 M&A 통한 지배구조 제어 중요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얼마 전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오디오 및 전장(電裝·자동차용 전자장비) 기업인 미국 하만(Harman)을 80억달러(약 9조4000억원)에 전격 인수했다. 이는 국내 업체의 해외기업 인수합병(M&A)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 사유와 금액의 적정성은 한동안 화제가 됐다. 처음에는 애플사의 비츠사 인수합병과 비슷한 오디오 및 전장사업 강화 측면에서 회자됐지만 곧 보다 큰 그림 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인수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즉, 자율주행 자동차 및 커넥티드카로 대변되는 미래 자동차시장의 주도권을 한발 앞서 확보하려는 포석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하만은 그룹 내 총 매출의 65%가 전장분야에서 발생하고 있고, 프리미엄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시장 점유율 1위, 텔레매틱스 시장 점유율 2위에 자리해 있는 등 미래 자동차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할 전장부문의 잠재력이 풍부하다. 이런 분석들이 등장하자 인수금액이 너무 과다하지 않으냐는 비판은 조용히 사그라지는 모양새다.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는 ‘역삼각합병(reverse triangular merger)’이라는 다소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돼 관심을 모았다. 역삼각합병이란 피인수기업이 되레 인수기업의 자회사를 흡수합병해 인수기업의 자회사로 자연스레 편입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가 역삼각합병 기법을 활용한 이유는 첫째, 기존 하만 주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다. 하만이 삼성전자 자회사를 흡수합병하면서 자회사 주식이 하만의 주식으로 바뀌고, 하만은 삼성전자 자회사로 바뀌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하만의 기존 주주권이 소멸되고 대신 합병 대가를 받을 권리로 전환된다. 둘째, 역삼각합병을 통해 하만의 고객 및 사업영역을 그대로 보존하게 된다. 역삼각합병 하에서는 피인수기업의 정관과 내부 규정이 그대로 유지돼 피인수기업의 고객사들이 계약해지를 요구할 근거가 없다. 또 피인수기업의 기존 사업권, 상표권 등도 지배구조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라이벌사인 LG전자의 스마트폰에 공급되는 하만의 오디오 기술은 삼성전자 인수 후에도 그대로 제공된다.근본적으로 첨단기술산업에서 인수합병은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변화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기법 중 하나다. 인공지능(AI) 분야의 경우 구글의 딥마인드, 애플의 시리, 삼성전자의 비브랩스 인수 등의 사례를 보면 인수합병을 통한 혁신기술의 수용은 대세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특히 시리의 핵심 개발자들이 설립한 비브랩스를 애플의 라이벌인 삼성전자가 인수한 점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혁신기술의 범용화(commoditization)’ 현상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이처럼 인수합병은 기업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경영 기법이다. 이런 기업 지배구조의 변화는 기업의 혁신노력과 기업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줄리안 아타나소브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다음 몇 가지 결과가 밝혀졌다. 첫째, 인수합병이 줄어들면 혁신이 감소한다. 둘째, 원래 지배구조에 대한 감시와 관리가 덜한 기업들에서 혁신 감소가 더 심하다. 셋째, 혁신 감소는 결국 기업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요약하면 적대적 인수합병은 혁신을 자극하고 결국 기업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이 연구는 경제구조 선진화가 시급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인수합병을 포함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업의 핵심역량 강화에 필요한 인수합병 등을 속도감 있고 정교하게 진행해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기회를 적시에 잡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인수합병 같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구조를 제어할 수 있는 여러 제도를 도입하거나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영자들이 자신의 커리어와 경영권에 대한 위험요인을 인지하고 혁신 노력에 힘을 쏟을 것이다. 셋째, 투자사들 예를 들어 연금이나 자산운용사들이 경영진에 대한 감시를 충실히 수행해 혁신을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넷째, 지배주주들이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사 및 지배주주들의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과 의결권 행사가 가치중심적으로 또 시장 원리에 근거해 이뤄져야 하는 점은 깊게 생각해 볼 부분이다.모바일, 융합시대가 번성하며 ‘혁신의 덫’이란 용어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혁신이란 용어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왜 혁신이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 목적의식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리사 발리칸가스와 마이클 지베르트 교수는 혁신의 덫을 ‘퍼포먼스의 덫’(performance trap·핵심사업 성과에 취해 중요 기회를 놓치는 것), ‘커미트먼트의 덫’(commitment trap·지나치게 신중하거나 공격적이어서 혁신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 ‘비즈니스 모델의 덫’(business model trap·성과가 좋은 기존 혁신모델에 매달리는 것)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위 ‘경계설정전략’을 제시했다. 많은 글로벌 일류기업은 다양한 노력을 통해 혁신의 덫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왔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소스 기술을 등한시하지 않아 퍼포먼스의 덫을 피했고, 석유회사 쉘은 게임체인저라는 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핵심사업과의 관련성을 기준으로 실행할 혁신활동의 경계를 정해 커미트먼트의 덫을 피할 수 있었다.

한동안 우리 기업들은 혁신의 결과물에 치중한 나머지 이런 혁신의 덫에 걸리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우리 기업들이 보여준 다양한 혁신사례, 특히 인수합병을 활용한 사례들은 혁신의 덫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혁신의 목적에 대한 이해 속에서 선제적이고 실용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oT) 등이 주된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는 시기에 퍼포먼스의 덫에 걸리지 않고 근본기술 개발에 주력하면서 핵심기술기업을 인수합병하는 등의 유연한 대응 모습을 보여주며, 이 과정에서 역삼각합병과 같은 시장 반응을 고려한 합병기법을 활용하는 모습도 혁신의 덫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반도체, 전자 등에 강점을 보이는 기업은 이와 연관된 자동차 전장과 관련된 사업으로 영역을 한정 짓는 등 경계설정전략도 명확히 해 혁신의 덫을 미리 차단하는 모습도 보인다.

기업지배구조의 변화 가능성 자체만으로도 혁신 노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아타나소브의 연구결과는 혁신에 목말라 있는 우리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영진도 뭔가 개인의 커리어에 위협이 되는 요인이 있어야 근본적인 변화를 고민하게 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을 되짚어 보게 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채찍뿐 아니라 지금 잘 활용되고 있는 당근들, 즉 연봉이나 승진을 혁신 성과와 연동시키는 여러 도구와 함께 활용하면 경제를 자극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한동안 혁신 열풍에 매몰돼 혁신의 덫에 노출돼 있던 우리 기업들에도 인수합병은 하나의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혁신의 덫에서 벗어난 기업

오정석 서울대 경영대 교수
2000년대 초반 매우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던 미국의 특수 가스 공급업체 에어 프로덕츠(Air Products)는 퍼포먼스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성장 전략을 수립하면서 “기존 상품의 경쟁력에 기반해 새로운 성장 전략을 수립한다”는 원칙을 자신들만의 경계설정전략으로 삼았다.에어 프로덕츠는 이런 경계설정전략 덕분에 무턱대고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성장의 기회를 잡으려는 무모한 도전을 스스로 피하며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독일 지멘스는 전 세계 100여개 사업장의 연구개발(R&D) 시설들과 중앙연구부서를 결합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근시안적인 태도를 버리려 했고, 그 결과 혁신의 덫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오정석 < 서울대 경영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