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 한지로 만든 조각…'조각난 마음' 어루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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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조각의 거장' 전광영 화백, 벨기에 보고시앙재단 초청전강원 홍천에서 사슴농장과 연탄·기와·벽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는 2대 독자인 아들이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원했다. 부친의 간절한 바람을 마다하고 미대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부터 ‘꿈을 꾼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절대 신봉하며 살았다. 꿈 없이 산다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고, 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생각에서다. 새로운 꿈을 찾아 400여차례 비행기에 몸을 싣고 미국, 유럽, 아시아 대륙 400만㎞를 누볐다. 맨주먹으로 ‘미술 한류’를 개척한 ‘한지 조각의 거장’ 전광영 화백(73)의 이야기다.
40대까지 주목 받지 못했던 그
한지로 싼 약봉지서 작품 영감
스티로폼에 한지 붙인 조각
동양 정서에 서양 조형미 담아
"지친 마음 약봉지처럼 감싸고파"
미술 인생 마라톤에서 이제 막 50년을 달려온 전 화백이 또 한 번 ‘한류 잔치’의 주인공이 된다. 벨기에 보고시앙재단 초청으로 오는 17일부터 8월13일까지 브뤼셀의 유서 깊은 전시장 ‘빌라 엉팡’에서 개인전을 연다. 보고시앙재단은 아르메니아 출신 보석세공사 로베르트 보고시안과 그의 두 아들이 1992년 설립한 비영리 문화재단이다. 재단이 그룹전이 아니라 한 명의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베니스비엔날레 등에서 큐레이터로 명성을 높인 재단 아트디렉터 아사드 라자가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전 화백의 1990년대 초기 작품부터 화려한 색채를 가미한 최근작까지 ‘집합(Aggregation)’ 시리즈 14점이 걸린다.
7일 경기 판교 작업실에서 만난 전 화백은 세계적인 재단에 초대된 데 대해 “한지 오브제 작업이라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동양적 정서와 서양적 조형 논리를 동시에 소화해 낸 게 눈에 띈 것 같다”고 말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전 화백은 미국 필라델피아대 대학원까지 유학했지만 40대 초반에도 국내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학원 선생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90년대 초 큰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한의원에서 늘 봐온 한약 봉지 작업이 번개처럼 척수에 박혔다. 곧바로 한약 봉지를 싸듯 한지로 싼 삼각 형태의 스티로폼 조각들을 캔버스에 일일이 붙여 한국 특유의 조형을 실험했다. 어머니가 싸개질로 쓰셨던 보자기 문화를 작품의 유전자로 보탰다. 종이에 오미자, 구기자, 치자, 쑥을 태운 재 등을 이용해 전통 색감도 입혔다. 염색된 한지 속에는 한자가 적힌 손때 묻은 오래된 책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나게 했다. 캔버스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요철의 질감을 극대화했고, 설치작품으로까지 작업을 확대해 나갔다.조상들의 흔적과 영혼이 지문처럼 남겨진 고서를 활용한 그의 작품은 단번에 국제 화단을 열광시켰다. 2009년 미국 코네티컷주 얼드리치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은 뉴욕타임스에 리뷰 기사가 실릴 만큼 좋은 평가를 얻었다.
일본 모리아트센터, 캐나다 몬트리올의 란다우갤러리, 싱가포르 타일러센터, 미국 와이오밍대 부설 미술관, 런던의 버나드 제이콥슨갤러리 등에서 연 개인전에도 국제 미술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할리우드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은 2014년 9월 미국 마이애미비치에서 열린 아트페어(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그의 작품 두 점을 29만달러에 구입해 화제가 됐다.
유명인은 물론 내로라하는 해외 미술과 화랑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고서로 꽁꽁 싸맨 작품에는 연기(緣起) 같은 동양적 세계관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인간의 관계(스티로폼)와 삶의 흔적(고서)을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소통의 미학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했다는 얘기다. 전 화백은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깃든 고서는 정신을 물질화해 보전시키는 매개체”라며 “한국의 아픈 역사와 상처까지도 약봉지처럼 감싸고 싶었다”고 설명했다.당대의 사상과 유행,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고서를 모티브로 한국 현대미술을 어떻게 우리 가슴에 꽃피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노 화가의 집념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