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혐오 극복한 '정치 콘텐츠'…시대의 길을 묻다

JTBC의 ‘썰전’
지난해 9월 대한민국은 전대미문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국민은 큰 실망과 정치 혐오에 빠졌다. 그런데 이런 위기에서 오히려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여러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조기 대선으로 이어졌다. 정치 혐오를 극복하고 시민 개개인이 정치적 주체가 됐다.

이 시기 국민의 눈과 귀가 끊임없이 향하는 곳이 있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정치 콘텐츠들이다. 사람들은 정치 기사를 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썰전’ ‘외부자들’과 같은 전문가들의 분석부터 SNL코리아의 ‘미운 우리 프로듀스 101’, SBS플러스의 ‘캐리돌 뉴스’와 같은 풍자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정치적 해석에 귀기울였다.JTBC의 ‘썰전’은 방송 전후 매번 실시간 검색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자취를 감췄던 정치 풍자도 되살아났다. ‘미운 우리 프로듀스 101’이 보여준 문재수, 레드준표, 안찰스 등 대선 후보 패러디, ‘캐리돌 뉴스’의 국정농단 사태 풍자는 네티즌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팟캐스트도 정치 콘텐츠를 대중화한 언더그라운드의 주역이다. 국정농단 사태 이전 팟캐스트에선 이미 날카로운 시선과 토론이 오갔다. 이처럼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안으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변화도 앞당길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변화한 정치의식과 적극적인 참여로 막 올린 ‘정치의 시대’. 정치 콘텐츠는 물밑에서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탰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쏟아진 정치 콘텐츠는 흥밋거리 그 이상이었다. 국민은 무심코 틀어놓은 TV 속 정치 프로그램을 통해 무관심과 혐오를 서서히 극복해 나갔다. 정치 콘텐츠가 정치 관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는 투표율과도 무관하지 않다. 역대 최고 사전 투표율,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최종 투표율은 이 같은 정치적 자각이 만들어낸 결과다.

정치 콘텐츠는 정치를 ‘개인화’한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이 보이던 정치를 가깝게 느끼도록 한다. 여기에 재미까지 더해지면 쉽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효과가 극대화된다.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미국 성인 37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심야 토크쇼 등 ‘정치 예능’을 통해 관련 정보를 얻었다고 응답한 비율이 25%에 달했다.국내 정치 콘텐츠는 그러나 해외에 비해 좀처럼 발달하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뉴스가 아니라 콘텐츠로 정치를 언급하는 일은 암묵적 금기였다. TV토론도 1995년 서울시장 선거 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에서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으로 시작된 것에 비해 35년이나 늦었다. 1999년 ‘100분 토론’ 등이 나오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진지하기만 한 프로그램이었다.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풍자적 내용이 담긴 콘텐츠는 SNL코리아가 2012 대선을 앞두고 선보인 ‘여의도 텔레토비’가 있다. 하지만 전 정부의 압박 속에서 사라졌다. 이로 인해 TV에선 정치 콘텐츠를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썰전’을 시작으로 하나둘 생겨나더니, 정치 위기가 닥친 시기에 오히려 정치 콘텐츠는 전성기를 맞았다.

한동안 봇물처럼 터져 나온 정치 콘텐츠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지금까지는 각 사건과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자극적이고 이미지만 부각된다는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시간이 지나면 관심이 급속히 식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극복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선 정치 이슈와 정책 이슈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람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팟캐스트 등에서 신문고 역할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처럼 여겨지는 이 말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하지만 일상 속에 정치 콘텐츠가 깊숙이 파고든다면 더 이상 정치는 외면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