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에 녹여낸 아픈 상처…"나무는 역사의 목격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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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가 손장섭 화백 학고재갤러리서 회고전1980년대 민주화 흐름 속에서 본격 등장한 민중미술은 노동자 등 서민의 고달픈 삶을 직설화법으로 표현한 ‘한국판 리얼리즘’ 장르다. 전남 완도 출신의 손장섭 화백(75) 역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와 민감한 시국 문제를 화폭에 담았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 동인이자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초대 회장을 지낸 그는 민중미술의 정신을 나무와 자연 풍경에서 찾아내 서민의 초라한 삶을 품고 신음했다. 역사와 자연을 조화롭게 융합한 그는 1998년 제10회 이중섭미술상을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손 화백이 17일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시작했다. 5년 만에 서울에서 펼치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역사, 그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회화’. 1960년대 시위대 풍경부터 200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작업한 나무와 산 그림까지 모두 38점을 걸었다. 쓰라린 역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기억을 화면에 성실하게 기록한 노화가의 열정과 집념을 엿볼 수 있다.
경기 파주 광탄면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손 화백은 특이하게도 웅장한 산을 비롯해 수령 500년이 넘은 나무를 많이 그렸다. 최근에는 수령이 2000년에 달하는 울릉도 향나무와 남양주 용문사 은행나무, 영월과 강화도의 은행나무, 부여 성흥산성 느티나무, 이천의 백송 등 고목들을 화폭에 담았다.
유독 고목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나무는 역사의 목격자이자 민중”이라며 “오래된 나무에서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기운이 전해진다”고 했다.“자연은 현실에서 유리된 대상이 아닙니다. 서민의 삶이 펼쳐지는 터전이자 역사가 배어 있는 현장이죠. 나무만 해도 곧 삶이고 역사입니다. 줄곧 한 자리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봤을 테니까요.” 나무는 수동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내면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역사가 있다는 얘기다.
손 화백은 나무 그림 외에도 1960~2000년대 근현대사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을 내보인다. 서라벌예고 3학년 때 목격한 4·19혁명의 시위대 풍경을 그린 ‘사월의 함성’이 대표적이다. 민주화를 위한 당시의 염원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1960년 작업한 ‘천막촌’ ‘답십리 굴다리’ ‘남대문 지하도’ 등은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민의 삶을 발가벗겨 보여준다. ‘달동네에서 아파트로’ ‘우리가 보고 의식한 것들’ 등은 산업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혼미한 정체성을 가볍게 건드린다.
작가는 “평범해 보이지만 역사와 관련있거나 삶에 깊숙이 뿌리 내린 풍경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18일까지.(02)720-152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