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서면동의 없는 사망보험 무효"…대량 해약 혼란에 반대 판결도
입력
수정
지면A20
타인의 사망 보험계약과 서면동의 (대법원 1996년 11월 22일 선고, 96다37084 판결)보험계약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험에 붙여 그 사람이 사망하거나 다쳤을 때 자기나 남이 보험금을 받도록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험 가입 때 그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생명·신체를 보험에 붙여도 좋다는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일제 때부터 이 규정이 있었지만 보험 가입 후에 동의해도 되는지, 구두 동의해도 되는지 분쟁이 이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1991년 상법 제731조 제1항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동의는 ‘보험계약 체결 시에’ 해야 하고, 그 형식은 ‘서면’으로 제한했다. 이 법조항은 강행 규정이다.
김선정 <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 >
원고측
서면 동의는 피보험자 보호 목적
보험료 받은 보험사 위한 것 아냐
대법원 판결
서면동의는 법에 명시한 규정
보험사, 신의성실에 반하지 않아
생각해볼 점
무효 계약 늑장 인정이 화근
동의 시기·방식 놓고 불씨 여전
개정 상법에 따른 첫 대법원 판결은 1996년에 나왔다. 이 판결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왔다. 그로부터 4반세기, 비슷한 판결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생명보험 계약 건수가 인구 수보다 많은 8300만 건에 이르는 오늘날 이 판결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1993년 어느 날 김모씨 부인이 남편이 사망하거나 다칠 경우 보험금을 받는 보험에 가입했다. 보험회사 보험설계사는 보험계약 내용을 부인에게 설명하고 합의한 후 회사로 돌아와 청약서를 작성하면서 자필서명란에 자신이 직접 김씨 이름을 썼다. 1994년 김씨는 위암 등으로 수술을 받게 되자 보험금을 달라고 했다. 보험회사는 김씨의 친필 서명이 없다는 이유로 보험계약이 무효라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김씨 부인은 1995년 5월 보험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서면 동의 없는 계약 유무효 공방원고는 상법 제731조 제1항은 오로지 타인(피보험자)을 보호하는 규정이지 보험자(보험회사)를 위한 규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보험회사인 피고가 이 사건 보험계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보험료를 징수하고서도 보험사고가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피보험자의 서면 동의가 없었다는 사유를 내세워 이 사건 보험계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배한 반사회적인 주장이거나 금반언(禁反言: 행위자가 특정한 표시를 한 이상 나중에 그 표시를 부정하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의 원칙을 위배한 행위로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 보험회사는 제731조 제1항의 입법 취지에는 공서양속(公序良俗: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 침해의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한 것도 들어 있으므로 꼭 피보험자 보호만을 위한 조항은 아니며 피보험자의 서면 동의가 ‘보험계약 체결 시’ 이뤄져야 하는 것은 법률이 규정한 것이라고 맞섰다. 김씨 부인은 1·2심에서 모두 패소했으나 대법원에 상고했다.
“서면 동의는 계약 체결 시까지 해야”
대법원도 원고의 주장을 물리쳤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상법 제731조 제1항은 강행 법규로서 이를 위반한 계약은 무효다. 둘째, 이 조항의 입법 취지에는 도박 보험의 위험성과 피보험자 살해의 위험성 외에 타인의 사망을 이른바 사행계약상 조건으로 삼는 데서 오는 공서양속의 침해 위험성도 들어 있다. 상법 제731조 제1항을 위반해 보험계약을 체결한 자(보험회사) 스스로가 무효를 주장함이 신의성실의 원칙 또는 금반언의 원칙을 위배하는 권리 행사라는 이유로 이를 배척한다면, 그와 같은 입법 취지를 완전히 몰각(沒却·아주 없애버림)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보험회사가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 또는 금반언의 원칙에 반(反)한다고 볼 수 없다. 셋째, 서면 동의는 계약 체결 시까지 해야 한다. 그해 연초부터 시행된 개정법에 꼭 들어맞는 판결이었다.이 판결 이전에도 동의 없는 타인의 사망보험 계약을 무효로 하는 판결은 많았다. 그런데도 이 판결이 큰 파장을 던진 것은 그럴 만한 전후 사정이 있다. 수십년 동안 동의 여부를 둘러싼 분쟁이 그치지 않자 우선 급한 대로 서면 방식만 약관에서 허용했다. 이후에도 약관에 그런 제한을 둘 수 있는지 시비가 일었다. 그러자 당시 재무부는 동의 방식을 ‘서면’으로 제한하는 법 개정을 건의했다. 법무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1991년 상법 개정을 통해 시기는 ‘보험계약 체결 시’로, 방식은 ‘서면’으로 제한됐다. 이 개정 조항은 1993년 1월1일부터 시행됐는데, 이 사건 계약은 그 후 가입한 것이다.
대량 해약 사태와 보험금 지급 결의
이 판결이 나자 언론은 보험금을 못 받는다는 점을 강조해 보도했다. 수많은 보험계약자가 당장 보험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나섰다. 남편에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험금을 받아 생계를 꾸리거나 치료비에 쓸 요량으로 아내가 보험에 가입해 둔 사례가 많았다. 대량 해약 사태와 보험사에 대한 비난에 당황한 당시 33개 생명보험회사 사장은 긴급회의를 열어 대법원 판결을 무시한 채 보험금을 주기로 결의했다. 판결이 난 지 2주 만의 일이었다(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10일자).사장단은 이 결의를 주요 신문 1면에 크게 광고까지 했다. 당시 보험감독원은 서면 동의를 안 한 보험계약자들이 요구할 경우에는 ‘보험계약 유효확인서’를 발급해주라고 전 보험사에 지시했다. 사장단 결의 후 4일 만의 일이다. 그러자 사장단 결의에 신문광고까지 했으니 서면 동의를 문제 삼아 보험금을 안 주는 것은 신의성실 및 금반언 원칙에 반한다는 고등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대법원 판결은 처참한 꼴이 됐다.
여전히 끊이지 않는 분쟁
1996년 판결은 개정 법조문에 충실한 나무랄 데 없는 판결이다. 그래서인지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에 법원은 다시 1996년 판결에 충실히 따랐다. 바뀐 것은 사안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네 가지 방향에서 논의와 판례가 이어졌다.
첫째, 계약 체결 후 사후 동의가 가능한지, 보험 가입 직후 피보험자가 신체검사 또는 검진을 받거나 검진서를 제출한 경우 등을 동의의 추인(追認: 어떤 행위가 있은 뒤에 그 행위에 동의하는 일)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인데 법조문의 ‘보험계약 체결 시에’라는 부분에 걸려 부인됐다.
둘째, 동의 방식으로 휴대전화 문자, 태블릿PC 등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동의 방식이 허용되느냐 하는 것인데 이 또한 법조문의 ‘서면’이라는 표현에 걸려 모두 막혔다.
셋째, 보험모집인이 서면 동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경우 보험계약의 성립 및 효력 여부다. 그 경우는 상법의 설명의무 위반이 돼 계약이 성립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보험계약자가 보험계약을 취소하고 낸 보험료를 찾아가거나 보험회사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 1996년 판결은 비록 설명이 안 되거나 보험모집인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보험계약은 성립하고 다만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보험계약자는 모집인의 잘못을 이유로 보험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데, 손해액은 그가 낸 보험료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계약이 유지되면 받았을 보험금이라고 봤다. 다만 서면 동의 요건을 잘 살펴보지 않은 보험계약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20~40% 정도의 과실상계(채권자에게 과실이 있어 금액을 정하는 데 참작)를 하는 게 보통이다.
넷째, 단체보험의 경우인데 보험금을 회사가 가져가느냐 혹은 근로자와 그 유족에게 주느냐에 따라 동의 여부가 달라졌다.
이 시간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분쟁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국회의 법 개정, 법원의 유연한 법 해석, 사업자의 철저한 모집관리, 스스로의 계약을 책임 있게 살피는 고객의 의식이 합쳐져야 분쟁을 일부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 일본에선 보험동의 방식 서면 한정 안 해
외국에서는 피보험자인 ‘다른 사람’이 혈연일 것,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을 것, 서면 동의를 받을 것 등 다양한 조건을 규정한다. 서면 동의를 받도록 하는 것은 독일 등 대륙법계 국가 보험법의 공통 현상이다. 영미에서는 부양관계, 채권관계, 고용관계 등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는 타인만을 피보험자로 할 수 있지만 이것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실무상 서면 동의를 받는 경우도 많다.일본법은 동의 방식을 서면에 한정하지 않고 있고, 동의 시기에 대해서도 계약 체결 시까지 동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법원은 추인 여부를 선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김선정 <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