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랑의 영화랑] '그 후'를 본 후

칸 경쟁부문 초청작 '그 후' 국내 첫 언론 시사회

홍상수 특유의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불륜 빠진 남녀 이야기 다뤄
'감독의 뮤즈' 김민희, 몽환적 연기 돋보여
영화관은 그리 달라진 것 없지만 영화표 가격은 어느새 1만 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4인 가족이 주말 영화 나들이 한번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데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만 보나요. 캐러멜 팝콘도 먹고 싶고, 콜라도 먹어야 하니까요.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영화 선택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잘 빠진 예고편에 낚이는 일 없어야겠죠. 실패 없는 영화 선택을 위해 개봉을 앞둔 신작들을 먼저 만나봅니다. 당신(의 시간과 돈)은 소중하니까요.

◆ 그 후 (The Day After)
홍상수 감독|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조윤희 출연|드라마|7월 6일 개봉|청소년관람불가
영화 '그 후' 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사진=전원사
담배 연기만 하얗게 피어오르는 깜깜한 새벽입니다.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은 "새벽에 왜 나가? 여자 생겼지?"라는 아내 해주(조윤희)의 물음을 뒤로하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사실 그에게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연인이 있습니다. 출판사 직원 창숙(김새벽)입니다.

봉완과 창숙은 '갈 때까지 간' 부도덕한 사랑을 합니다. 내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불륜의 케이스죠. 하지만 아내와 딸을 위해 퇴근길마다 간식거리를 실어 나르던 봉완에게 창숙은 "비겁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이별. 창숙이 떠난 지 한 달, 빈 책상은 작가 지망생 아름(김민희)이 채웁니다.

아름은 친분이 있는 교수의 소개로 봉완의 출판사에 첫 출근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 좋아했던 사람인 언니의 죽음을 털어놓으면서 사장 봉완과의 거리를 좁힙니다. 중국집에서 아름은 점심을, 봉완은 소주를 털어넣으며 삶의 이유와 믿음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봉완이 사무실을 비운 사이 아내 해주가 들이닥칩니다. 남편이 창숙을 떠올리며 쓴 사랑의 시를 발견했기 때문이죠. 해주는 "누구시냐"고 묻는 아름의 머리채를 다짜고짜 휘어잡고 뺨을 휘갈깁니다. 아름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 아니다"라고 손사레를 치지만 해주는 그녀가 남편의 불륜녀라고 굳게 믿습니다. 허겁지겁 나타난 봉완의 해명도 도통 통하지 않습니다.

해주가 떠나고 봉완과 아름만 남았습니다. "함께 일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소주를 들이키는 아름을 봉완이 붙잡습니다. 하지만 이때 영국으로 떠났던 창숙이 돌아옵니다. "사랑만 하다 죽자"면서 말이죠.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는 영화 '그 후'였습니다.
영화 '그 후' 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사진=전원사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주로 지질해 보일 정도로 치졸한 남자와 기묘한 분위기의 매력적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 후'의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실제 연인인 김민희와, 그의 부인의 관계가 연상됩니다. 그래서 봉완과 창숙의 애정행각은 철저히 짜여진 허구로만 보이질 않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딘가엔 있을 법한,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니까요.

작품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시퀀스는 보는 이를 몰입하게 합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가 병행되며 갈등-위기-갈등-위기가 반복됩니다. 소재가 불륜인 만큼 속 시원히 해소되는 지점은 없지만 '홍상수식 유머'를 곳곳에 배치해 실소를 터트리게 합니다. 칸이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흠을 캐내기 힘듭니다.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한 불륜남 봉완을 연기한 권해효는 영화 속 인물을 현실의 일부로 착각하게끔 절제된 연기를 합니다. 불륜녀 창숙 역의 김새벽 또한 알고보면 소악마 같은 약삭빠른 여자로 분해 제 몫을 다합니다. 모델 출신으로 스타에 가까웠던 김민희는 이제 완벽한 홍상수 감독의 뮤즈가 됐습니다. 몽롱하고 나른한 특유의 분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호들갑스럽지 않은 일상적인 연기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합니다. 아쉽습니다. 도덕적 잣대만 들이대지 않으면 영화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한 줄 평 : 꿈 보다 해몽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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