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그해 겨울, 흥남부두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67년 전인 1950년 12월22일, 흥남부두에 칼바람이 몰아쳤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던 미군과 국군의 철수작전은 급박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적 12만 명을 저지하고 17일 만에 탈출한 미국 해병 1만여 명을 비롯해 군인만 10만5000여 명. 시간은 없는데 적의 포성은 점점 가까워졌다.

진짜 절박한 것은 아비규환 속의 피란민들이었다.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반대해 유엔군에 협조한 사람과 기독교인들이었다. 미군 지휘부는 병력과 군수물자만 수송하기에도 벅차 민간인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다. 미 10군 사령관 고문 현봉학 박사는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도 “피란민을 태우지 않으면 저들과 함께 육로로 내려가겠다”며 버텼다.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힘입어 목숨을 구한 피란민은 모두 9만8000여 명. 부두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하던 여학생 50여 명도 배에 탔다.

이날 마지막으로 떠난 배는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는 군수물자 25만t을 버리고 피란민 1만4000여 명을 태웠다. 16시간에 걸친 ‘승선 작전’을 거쳐 흥남부두를 출발한 것은 12월23일. 발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피란민을 실은 배는 이틀간의 항해 끝에 12월25일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다섯 명의 아이가 배 안에서 태어났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이 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타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3년 만인 1953년 1월 거제에서 태어났다. 흥남 철수 때 이산가족이 된 피란민들은 부산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대부분은 만나지 못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 비극을 담은 노래다. 이들 ‘3·8따라지’(38선을 넘어온 빈털터리)는 국제시장을 거점으로 전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문 대통령이 모레부터 시작되는 미국 방문 행사에 흥남 철수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들을 초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네스북에 ‘단일 선박으로 최다 인원을 구출한 배’로 등재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가톨릭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됐다가 2001년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나마 살아남은 노병도 많지 않다. 이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고 있다.

미 해병 1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에 참가했던 제임스 워런 길리스(87)는 엊그제 방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목숨엔 기한이 있지만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없어요.”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