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대학살의 신',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중산층의 위선

리뷰
다음달 23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대학살의 신’. 신시컴퍼니 제공
유머에는 두 종류가 있다. 명랑한 웃음을 자아내는 보통의 유머가 그 하나다. ‘블랙유머’는 정반대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에서 길어낸 에너지로 씁쓸한 웃음을 만든다.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대학살의 신’을 관람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었다. 하지만 이 연극이 만드는 웃음은 한때 유행한 노래 가사처럼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이 작품은 문명사회의 교양인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선적인지, 이들이 가장한 평화는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까발리는 ‘블랙코미디’다.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희곡으로, 연극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미국 토니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공연기획사 신시컴퍼니가 2010년 국내 초연했고. 2012년 2월 재연한 이후 5년여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열한 살의 두 아이가 놀이터에서 싸웠다. 한 아이의 앞니 두 개가 부러졌다. 사건 이후 두 아이의 부모가 피해자 아이 집 거실에서 만난다. 속상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부모들은 어떻게든 좋게 해결해보려고 애쓴다. 그들의 웃음과 친절은 가식이든 과장이든 경이로울 정도다.

하지만 위장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이들 싸움의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해결책에 합의하기까지 두 부부는 내내 삐거덕거린다. 일촉즉발의 위기는 결국 현실이 된다. 철부지 애들 싸움이 어른들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다. 두 부부 간 싸움에서 커진 분노의 에너지는 각 부부 안의 숨겨진 갈등까지 터뜨린다.배경 한 번 바뀌지 않고 등장인물이나 사건의 추가 또는 반전도 없이 흘러간다. 이런 ‘직선형 연극’에서 네 배우의 에너지가 요동친다. 뮤지컬 배우 남경주·최정원이 가해자 부모 알렝·아네뜨 역을, 탤런트 송일국과 연극배우 이지하가 피해자 부모 미셸·베로니끄 역을 맡았다. 모두가 교양과 평화주의로 덧칠한 가면을 쓰고 있다.

베로니끄의 모순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참상에 자기 일인양 마음 아파하며 세계의 평화를 진심으로 바란다. 상황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꿔야만 직성이 풀리는 융통성 없는 이상주의자다. 베로니끄가 극 말미에 교양과 우아함을 내던지고 주먹 쥔 두 손을 하늘로 쳐든 채 발을 구르며 포효하는 장면은 비극을 희극으로 만드는 블랙유머의 백미를 보여준다.

등장인물 누구도 쉽게 비난하기 어렵다는 데서 관객은 딜레마에 빠진다. 본의 아니게 갈등을 키우는 베로니끄조차 의도는 선이다. 그런데도 결말은 파국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듯 흘러간다. ‘대학살의 신’은 인간 존재의 모순 자체에 숨어 있는 듯하다. 다음달 23일까지, 4~6만원.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