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가 룰 만들고 심판까지 보나"…스튜어드십 코드 '절대 권력' 기업지배구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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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의결권 행사 지침 만들고 기업 평가와 의결권 자문도 맡아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지침) 도입 이후 처음으로 시행되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ESG(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에 기업들이 우려와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일각에선 스튜어드십 코드 원칙을 정하고 이를 이행·점검하는 기업지배구조원이 ESG 평가와 기관투자가 대상 의결권 자문 사업까지 함께하는 건 이해관계 상충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불만 터뜨리는 상장사들한국거래소 산하 기업지배구조원은 지난 3월부터 진행한 ESG 평가에 대한 상장사의 이의 신청을 10일 마감했다. 한 달 동안 이뤄진 이의 신청에선 예년보다 훨씬 많은 상장사들이 ‘소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기업 투명성을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ESG 평가 결과가 중요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ESG 평가는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에 중요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이해관계 상충 소지 크다" 지적
"엔터사에 온실가스 감축하라니…" 기관들, ESG 평가방식도 불만
기업지배구조원이 기관에 전달하는 의결권 자문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ESG 종합평가 결과가 S, A, B, C로 나눠 표기된다. ESG 평가가 낮으면 의결권 행사 방향도 부정적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한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은 “평가 점수가 낮으면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는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며 “이전엔 낮은 등급이 나와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현 정권에서 ESG 평가 결과가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일부 업종에 불리한 평가 방식을 둘러싼 불만도 나오고 있다. 한 미디어 기업의 재무담당 임원은 “환경평가 항목에 포함된 온실가스 감축 설비 투자 등은 제조업 외에는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적지 않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및 서비스 기업들이 환경평가 부문에서 낮은 점수를 얻어 종합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입김 세진 기업지배구조원
전문가들은 스튜어드십 코드 원칙을 만든 기업지배구조원이 기업 평가와 의결권 자문 등을 동시에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업지배구조원은 국내 3대 연금인 국민연금과 사학연금, 공무원연금에 의결권 자문을 하고 수수료를 받는 민간 기업이다. 행정공제회 등 일부 공제회와 자산운용사도 고객이다.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상황에서 기업지배구조원은 이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잘 지키는지 등을 점검하는 역할도 맡게 된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기업지배구조원에 의결권 자문을 맡긴 기관투자가에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점검 점수를 잘 줄 것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며 “‘선수(의결권 자문)’가 ‘룰(스튜어드십 코드 제·개정, 이행·점검)’을 만들고, 심판(기업 평가)으로까지 뛰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기업지배구조원의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데엔 스튜어드십 코드를 서둘러 도입한 금융위원회의 결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당초 스튜어드십 코드는 금융당국이 주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도 도입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민간 주도로 스튜어드십 코드 원칙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국내에서 의결권과 지배구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기관이 많지 않다 보니 의결권 자문과 기업 평가 등 영리활동을 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원에 업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게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김태현 금융위 자본시장국장은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점검 부문은 이해상충 소지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다른 기관에 넘길 수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가장 먼저 도입한 영국은 재무보고위원회(FRC)라는 공적 기관이 원칙 제정과 함께 이행·점검을 맡고 있다.
■ 스튜어드십 코드
연기금,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가 배당 등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 2010년 영국을 시작으로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도입했다.■ ESG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 기업이 직원과 고객, 주주, 환경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지배구조는 투명한지를 비재무적인 틀로 따지는 평가다. 한국거래소 산하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매년 시행한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