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획 실험 25년…"미술도 영화처럼 대중친화적 연출에 역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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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패스파인더 (1) '미술기획 마술사'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문화예술은 속성상 온고(溫故)보다는 지신(知新)에 목말라한다. 실험적 접근으로 문화적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는 창작자와 예술인은 그 자체로 보배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이라 할 남다른 문화콘텐츠는 한국 경제의 새 수원지(水源地)가 될 수 있다. 문학 출판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계 패스파인더(선도자라는 뜻)들을 통해 틀을 깨는 창의정신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선정 국제무대 데뷔
'전시기획의 한류' 이끄는 데 일조
이불·서도호·양혜규·박찬경·김범 등 작가 수백명 국내외 화단에 조명
"한국 현대미술 저평가 안타까워, 작가뿐 아닌 기획자 지원도 필요"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신임 대표(52)는 아버지(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와 절친했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 선생을 1991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다음해 백 선생의 추천으로 미국 휘트니미술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큐레이터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온갖 것에 덧씌워진 미술의 난해한 가림막을 제거해 누구나 공감하고 즐기는 ‘시각예술의 대중화’를 구현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세계적인 큐레이터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한국미술을 국제무대에 알리는 데도 팔을 걷어붙였다. ‘미술기획의 마술사’를 꿈꾸며 25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그가 한국미술 권력의 한복판에 섰다.뉴욕 프랫인스티튜트와 미국 미시간주 크랜브룩대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한 김 대표는 100여 개 국내외 전시를 기획할 정도로 해박한 미술 이론과 현장 실무 능력을 갖춘 ‘미술계 여걸’로 통한다. 그의 큐레이팅을 거쳐간 작가만도 설치작가 이불, 서도호, 양혜규, 김범, 박찬경, 백승우 등 수백 명에 달한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커미셔너를 맡은 그는 당시 한국 현대미술의 집약된 개성과 힘을 보여준 동시에 기획자의 목소리가 가장 뚜렷한 전시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는 군사독재의 잔재이기도 했던 기무사 터(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아트축제를 열어 정치와 미술의 상관관계를 풀어보기도 했다. ‘서울 미디어시티’(2010)와 광주비엔날레(2012)에서 감독을 맡았을 때는 관람객 40만 명을 끌어모을 정도로 대중친화적 기획력을 과시했다. 2012년부터 매년 8월에 강원 철원의 비무장지대(DMZ) 접경지역에서 여는 기획전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는 분단시대 미술의 역할과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김 대표의 기막힌 스토리와 기획력은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그는 “단순히 작가의 작품을 나열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과 취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자문해가며 작가와 대화하는 방식을 즐긴다”고 했다. 마치 영화를 연출하듯 작가들과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고 전시 개념과 스토리를 서서히 형성해나간다는 설명이다. 김 대표는 “작가의 작업 공간을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하다”고 말했다.
“작가의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작품 제작현장을 깊게 드러내기 위해 서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희열 그 자체입니다.”
그의 차별화된 큐레이팅은 자연스레 ‘전시기획의 한류’로 연결되고 있다.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카운티미술관과 휴스턴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연 한국 현대미술전은 그를 단번에 국제적 큐레이터 반열에 올려놓았다. 2015년 12월 일본을 시작으로 대만 홍콩 베이징에서 잇달아 개최한 ‘불협화음의 하모니’전, 작년 모리미술관 기획전 ‘롯폰기 클로싱’에서 한국 큐레이팅의 저력을 과시했다. 지난해에는 덴마크 아루스에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를 수출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 전시 공간에서 제대로 소개하는 큐레이터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정부의 미술정책이 작가 지원에만 머물지 말고 기획자 지원에도 신경써야 한다는 얘기다.그의 머릿속엔 늘 한국 현대미술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미술은 그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국제적으로 훨씬 저평가받고 있어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드라마·영화·가요·스포츠 등까지 넓게 퍼져 있는 한류가 미술에도 불어야 하지만 막연하게 기다릴 수만은 없지요.” 그는 이를 위해 미술계 체질을 개선하고 도화선이 될 방안들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광주비엔날레 행사에 대한 개인적 포부도 밝혔다. 광주비엔날레가 급속한 성장을 해오느라 놓친 부분이 있다는 그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획력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예술행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