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시대에 통했던 영수회담…노무현 정권 이후엔 얼굴만 붉혔다

이재창의 정치 view

돈·공천권 쥔 3김이 당 장악…담판으로 대치 정국 풀어
제왕적 총재 사라진 이후 '약발' 없어…협치·소통 중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9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동에 불참한다. 외교 성과를 설명하고 야당의 초당적 협력을 요청하는 ‘영수회담’에 제1야당 대표가 불참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 데다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막판까지 홍 대표를 설득한 이유다.

홍 대표의 표면적 불참 이유는 2011년 자신이 한나라당 대표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처리했을 때 ‘제2의 을사늑약’ ‘매국노’라고 비난한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사과가 없다는 점이다. ‘5자 회동’이라는 형식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자신이 ‘민주당 1, 2, 3중대’로 부르는 정의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대표가 참석하는 자리에 들러리 서기가 싫다는 것이다.여야 영수회담의 역사는 3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1990년대 한국 정치를 주도한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총리는 제왕적 당 총재(대표)였다. 돈과 공천권을 앞세운 계보정치로 카리스마 리더십을 구축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양김의 계보정치를 대변한다. 3김의 생각이 곧 당론으로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그 당시 3김(주로 YS와 DJ)이 담판의 장으로 활용한 게 바로 영수회담이다. 주요 현안을 놓고 여야가 끝까지 대립하면 막판에 양김이 나섰다. YS 집권 시절 청와대 ‘칼국수 회동’은 영수회담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합의문이 발표되고 경색정국이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영수회담은 꼬인 정국을 푸는 중요한 통로이자 유용한 수단이었다. 양김의 확고한 당 장악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3김 시대가 저물면서 영수회담의 효용성도 떨어졌다. 영수회담 또는 대표회담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만남은 계속됐다. 정국이 꼬이면 대통령은 어김없이 야당 대표와 만났지만 양상은 사뭇 달랐다. ‘만남을 위한 만남’에 그쳤다. 야당 대표는 역풍을 우려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대연정론’을 제안했다가 여권 내부 반발에 시달렸다.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세 차례 영수회담을 했다. 매번 평행선이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2011년 6월 MB와 만난 뒤 “그런 영수회담을 왜 했느냐”는 당내 반발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박 전 대통령도 세 차례 영수회담을 했다. 두 번은 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2015년 3월 첫 만남에선 경제정책에 대한 이견만 확인했고, 같은 해 10월 두 번째 만남에서도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말 박 전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했다가 거센 역풍에 회담을 취소했다.

영수회담의 효용성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양김과 같은 카리스마 리더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나를 따르라”는 양김의 말에 반기를 든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당 분위기와 다른 합의를 했다간 엄청난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 양보를 전제로 한 협치와 소통이 시대정신이다. 영수회담으로 막힌 정국을 풀겠다는 발상 자체가 먹히지 않는 시대다.

이재창 정치선임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