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창의 정치세계] 영수회담의 정치학-협치는 커녕 얼굴만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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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공천권, 계보정치로 당 장악한 양김시대엔 영수회담 담판이 주효
회담 결과 책임질만한 리더십 없어-소통과 협치의 시대엔 효용성 떨어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9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동에 불참한다. 외교 성과를 설명하고 야당의 초당적 협력을 요청하는 ‘영수 회동’에 제1야당 대표가 불참하면 모양새가 좋지않은데다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막판까지 홍 대표의 회동 참석을 설득한 이유다.홍 대표가 내세운 불참 이유는 자신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를 주도했을 때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제2의 을사늑약’‘매국노’라고 비난한 것을 들고있다. 그 당시 그렇게 자신에게 공세를 폈던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이 최소한의 사과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과를 안하면 회동에서 그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고 그러면 회동 분위기가 엉망이 되지 않겠느나는 것이다.
홍 대표 주변에선 ‘5자회동’이라는 형식을 탐탐치 않아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문 대통령과 성향이 비슷한 정의당과 국민의당 등이 문 대통령 의견에 반대하는 자신을 한목소리로 비판하는 장면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주당 2중대론’이다. 한 측근은 “민주당 1, 2, 3 중대가 참석하는데 홍 대표가 가면 들러리를 서는 꼴”이라고 했다. 홍 대표는 정의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을 ‘민주당 1, 2, 3중대’라고 부른다.
여야 영수회담의 역사는 3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김은 1980년부터 20여년간 우리 정치를 주도했다.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JP)는 제왕적 당 총재(대표)였다. 돈과 공천권을 토대로 한 계보정치로 막강한 카리스마 리더십을 구축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양김의 계보정치를 대변한다. 3김의 생각이 곧 당론으로 여겨지는 시절이었다.그 당시 3김(주로 YS와 DJ)이 담판의 장으로 활용한 게 영수회담이다. 주요 현안을 놓고 여야가 끝까지 대립하면 막판에 양김이 나섰다. YS 집권시절 청와대 ‘칼국수 회동’은 영수회담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합의문이 발표되고 경색정국이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영수회담은 꼬인 정국을 푸는 중요한 통로이자 유용한 수단이었다. 양김의 확고한 당 장악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김이 합의한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김 시대가 저물면서 영수회담의 효용성도 떨어졌다. 3김이 떠난 뒤에도 영수회담 또는 대표회담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정국이 꼬이면 대통령은 어김없이 야당 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동을 갖곤 했지만 양상은 사뭇 달랐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 모두 만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야당 대표는 역풍을 맞기 일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두차례 영수회담을 가졌다. 2005년 9월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대연정론’을 제안했다 역풍을 맞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 영수회담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5월 당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 회동했지만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협상과 한미간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문제를 놓고 논란만 벌였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9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만났지만 종합부동산세 등을 놓고 이견만 확인했다. 손 전 대표는 2011년 6월 이 전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한 뒤 “그런 영수회담을 왜 했느냐”는 당내 역풍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박 전 대통령은 2013년 9월 장외투쟁을 벌이던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졌지만 막힌 정국을 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과 두 번의 회담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2015년 3월 이뤄진 두 사람의 첫 회동에선 경제정책에 대한 현격한 이견을 확인했고, 2015년 10월 성사된 두번째 회동에서도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탄핵정국이 한창이던 지난해 말 촛불 민심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며 박 전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했다 거센 역풍을 맞았다. 추 대표는 회담을 해보지도 못한 채 14시간만에 영수회담을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하며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영수회담의 효용성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당 장악력 저하에 따른 리더십 부족이다. 양김 시대에는 “나를 따르라”는 양김의 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영수회담에서 당 분위기와 다른 합의를 했다간 엄청난 역풍에 직면하기 일쑤다. 양김과 같이 돈과 공천권을 갖고 당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가 아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협치와 소통이 시대정신이다. 영수회담 또는 대표회담으로 막힌 정국을 풀겠다는 발상 자체가 먹히지 않는 시대다.
이재창 정치선임기자 leejc@hankyung.com
회담 결과 책임질만한 리더십 없어-소통과 협치의 시대엔 효용성 떨어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9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동에 불참한다. 외교 성과를 설명하고 야당의 초당적 협력을 요청하는 ‘영수 회동’에 제1야당 대표가 불참하면 모양새가 좋지않은데다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막판까지 홍 대표의 회동 참석을 설득한 이유다.홍 대표가 내세운 불참 이유는 자신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를 주도했을 때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제2의 을사늑약’‘매국노’라고 비난한 것을 들고있다. 그 당시 그렇게 자신에게 공세를 폈던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이 최소한의 사과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과를 안하면 회동에서 그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고 그러면 회동 분위기가 엉망이 되지 않겠느나는 것이다.
홍 대표 주변에선 ‘5자회동’이라는 형식을 탐탐치 않아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문 대통령과 성향이 비슷한 정의당과 국민의당 등이 문 대통령 의견에 반대하는 자신을 한목소리로 비판하는 장면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주당 2중대론’이다. 한 측근은 “민주당 1, 2, 3 중대가 참석하는데 홍 대표가 가면 들러리를 서는 꼴”이라고 했다. 홍 대표는 정의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을 ‘민주당 1, 2, 3중대’라고 부른다.
여야 영수회담의 역사는 3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김은 1980년부터 20여년간 우리 정치를 주도했다.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JP)는 제왕적 당 총재(대표)였다. 돈과 공천권을 토대로 한 계보정치로 막강한 카리스마 리더십을 구축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양김의 계보정치를 대변한다. 3김의 생각이 곧 당론으로 여겨지는 시절이었다.그 당시 3김(주로 YS와 DJ)이 담판의 장으로 활용한 게 영수회담이다. 주요 현안을 놓고 여야가 끝까지 대립하면 막판에 양김이 나섰다. YS 집권시절 청와대 ‘칼국수 회동’은 영수회담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합의문이 발표되고 경색정국이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영수회담은 꼬인 정국을 푸는 중요한 통로이자 유용한 수단이었다. 양김의 확고한 당 장악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김이 합의한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김 시대가 저물면서 영수회담의 효용성도 떨어졌다. 3김이 떠난 뒤에도 영수회담 또는 대표회담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정국이 꼬이면 대통령은 어김없이 야당 대표와 청와대에서 회동을 갖곤 했지만 양상은 사뭇 달랐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 모두 만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야당 대표는 역풍을 맞기 일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두차례 영수회담을 가졌다. 2005년 9월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대연정론’을 제안했다 역풍을 맞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 영수회담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5월 당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 회동했지만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협상과 한미간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문제를 놓고 논란만 벌였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9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만났지만 종합부동산세 등을 놓고 이견만 확인했다. 손 전 대표는 2011년 6월 이 전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한 뒤 “그런 영수회담을 왜 했느냐”는 당내 역풍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박 전 대통령은 2013년 9월 장외투쟁을 벌이던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졌지만 막힌 정국을 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과 두 번의 회담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2015년 3월 이뤄진 두 사람의 첫 회동에선 경제정책에 대한 현격한 이견을 확인했고, 2015년 10월 성사된 두번째 회동에서도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탄핵정국이 한창이던 지난해 말 촛불 민심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며 박 전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했다 거센 역풍을 맞았다. 추 대표는 회담을 해보지도 못한 채 14시간만에 영수회담을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하며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영수회담의 효용성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당 장악력 저하에 따른 리더십 부족이다. 양김 시대에는 “나를 따르라”는 양김의 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영수회담에서 당 분위기와 다른 합의를 했다간 엄청난 역풍에 직면하기 일쑤다. 양김과 같이 돈과 공천권을 갖고 당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가 아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협치와 소통이 시대정신이다. 영수회담 또는 대표회담으로 막힌 정국을 풀겠다는 발상 자체가 먹히지 않는 시대다.
이재창 정치선임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