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이호재 "술이나 얻어먹자고 시작한 연극…평생 업으로 삼게 될지 몰랐죠"

'무대 인생 55년' 이호재 연극배우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나를 끝까지 무대에서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는 무대인이었다는 긍지를 한 줌의 흙이 될 때까지 갖게 하소서.’

1978년 출간된 연극인 11인의 산문집 《무대 밖의 모놀로그》(고려원 펴냄)에 실린 배우 이호재(76)의 글 중 한 구절이다. 당시 서른일곱 살 젊은이가 품은 스스로의 다짐이자 약속은 40년 가까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이호재가 올해로 무대 인생 55년차를 맞았다.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처럼 선선히 걸어오면서도 집요하게 무대를 지켜왔다. 1963년 ‘생쥐와 인간’으로 무대에 데뷔한 이래 이제껏 출연한 연극 작품은 100편을 훌쩍 넘는다. 1970~1990년대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동아연극상, 이해랑연극상 등 온갖 연기상을 휩쓸었고, 2011년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화와 TV 드라마에도 이따금 얼굴을 내비쳤다. 2015년에는 영화 ‘검은 사제들’에, 지난해와 올해엔 드라마 ‘닥터스’와 ‘비밀의 숲’에 각각 출연하며 젊은 세대에도 이름을 알렸다.

그는 다음달 17일부터 10일간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에 출연한다. 지난해 10월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공연 ‘불역쾌재’ 이후 10개월 만에 오르는 무대다. 이 작품은 일흔 살을 코앞에 둔 ‘국민학교’ 동창 세 명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마음속에 묵혀둔 노년의 첫사랑을 가슴 따뜻하게 펼쳐낸다.

지난 27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 1층 카페. 연분홍색 셔츠 소매를 세련되게 걷어올리고 진회색 메신저백을 어깨에 멘 채 그가 카페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왔다. 하반신은 베이지색 반바지에 고무 샌들 차림이었다. 신문에 실을 전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하자 “아이고 이런, 상체만 찍는 줄 알고 위쪽만 제대로 입고 왔는데”라며 허허 웃었다.가방에 빨간 앵그리버드 캐릭터 배지가 달려 있었다. 웬 앵그리버드냐고 묻자 “초등학교 4학년인 손녀딸이 달아줬는데 예뻐서 그냥 붙이고 다닌다”고 했다. 집에서는 두 아들의 아버지이자 두 손자 손녀의 할아버지, 무대에선 뜨거운 현역 배우인 그의 연극 인생을 들어봤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들어선 연극의 길

그는 1941년 서울 태생으로 휘문고를 나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아이스하키 선수였다. 장비값이 비싼 아이스하키는 당시만 해도 아무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사업을 하신 덕에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시국이 어수선한 1960년 봄이었다. 단지 목소리가 우렁차고 발음이 좋다는 이유로 선배들 손에 이끌려 학생들 앞에서 뭔가를 읽었다. 4·19 혁명 선언문이었다. 그 일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허송세월하던 그에게 인생을 바꾼 ‘우연’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친구 한 놈이 같이 연극을 해보자더군요. 동랑 유치진 선생이 드라마센터라는 극장을 세우고 한국연극아카데미를 여는데 학생을 뽑는다면서요. 한국연극아카데미는 현재 서울예술대 전신이에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치기 어린 마음에 거기에 들어가면 술이나 좀 얻어마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1962년 가을학기에 지원했는데 덜컥 붙어버렸어요. 거기서부터 제 연극 인생이 시작됐습니다.”그는 1963년 존 스타인벡 원작 ‘생쥐와 인간’의 레니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표현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자신도 ‘무대의 맛’을 알게 됐다. 그는 인물을 깊이 이해하고, 유연하고도 순발력 있게 표현하는 재능이 뛰어났다. 1971년 ‘잉여부부’로 이듬해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을 받고, 1977년엔 ‘페르귄트’로 같은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연극평론가 구히서는 그를 “연기의 교과서이자 대사의 달인”이라고 평했다.

“바람 부는 대로 산 것뿐인데, 우연이 필연이 된 것 같아요. 사람 사는 게 대개 그렇죠. 무슨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흥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재미를 못 느끼면 중간에 나가는 건데 저는 다행히 재미를 붙여서 끝까지 남은 경우죠. 정치인 중에서도 처음부터 내가 정치인이 되겠다 마음먹고 산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자연스레 들어섰다가 운명처럼 그렇게 살게 되는 거지요.”

TV서 다시 연극으로…기꺼이 자원한 고행

우연만을 따라 산 것은 아니다. 그는 더 편안할 수 있는 길을 두고 고된 연극의 길을 ‘선택’했다. 1970년대 연극배우로 이름을 알렸지만 경제적으로는 넉넉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연극배우들의 TV 드라마 진출이 활발해질 때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며 돈도 제법 벌었다. “연기를 시작한 이래 가장 주머니가 두둑했던 날들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회의감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당시 제 나이대 배우들 대부분이 연극판을 떠나 TV 드라마로 갔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연극은 누가 하나. 나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하루 날을 잡아 모든 방송 출연을 딱 접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왔죠. 당시 드라마에서 제가 맡던 인물은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 가고,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갔죠. 난감했을 당시 작가들에겐 지금도 미안해요.”

연극은 공연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예술’로 꼽힌다. 우문인 줄 알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연극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드냐”고. 그가 이렇게 답했다. “말해 뭐해요. 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큰아들이 고등학생 때 자기도 연극을 하겠다기에 말리다 못해 혼을 내서 내쫓은 적이 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는 무대에 서 있는 제 아비가 멋있어 보였던 모양이에요. ‘야, 고생은 나 혼자로 족하다. 내가 고생까지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렸지요. 그놈 지금은 회사 다니면서 잘삽니다.”

그런 길을 이제껏 걸어온 힘은 무엇일까. 그는 “무대의 맛, 연극의 맛 때문”이라고 했다. “TV 드라마나 영화는 시청률이나 관객 수로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죠. 하지만 연극은 그런 예술이 아니에요. 극장에 함께 있는 관객들하고 현장에서 같이 호흡하죠. 오직 그 순간, 그 장소에서, 그 작품을 통해 공유하는 호흡. 그 맛이 있어요.” 연극의 맛을 한창 이야기하던 그는 마음이 벅차오르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었다.

“인생 끝까지 무대에서 살 것”

무대 인생 55년. 상승기부터 침체기까지 배우들이 통상 겪는 주기를 수십 번은 겪었을 세월이다. “특별히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단번에 “없다”고 했다. “그리워해서 될 일도 아니고, 살아오며 온갖 경험을 다 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해 지금이 좋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요즘은 복작복작한 서울보다 조용한 데가 좋단다. 경북 영주 부석사 아래에 그 지역 연극인들이 마련해 준 작은 집에 종종 가서 쉰다. “산도 보고 나무도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시간이죠. 그런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극단 ‘목화’를 이끄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오태석은 과거 이호재에 대해 “평소 그는 남이 살아가는 데 쓰는 힘의 절반 정도만 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작품을 분석하고 대사를 익힐 땐 평소의 게으름이 그의 천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엔 절반 정도의 힘으로 살면서 작품을 대할 땐 온 마음의 힘을 끌어온다. 앞으로의 연기 인생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누구나 여태까지 해 온 일이 있고 앞으로 할 일이 있어요. 나이가 들다 보면 자기가 이제까지 어떤 경로를 지나왔나를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고 앞으로는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제가 앞으로 살 날이 한 10년쯤 될까요? 1년에 한두 작품 정도 연기한다고 하면 남은 생에 할 수 있는 작품이 한 열댓 개쯤 되는 거예요. 무슨 작품을 어떻게 해볼까 많이 생각하고 있죠.”
신구(왼쪽부터)·민지환·전무송·반효정
■ 연극인 산실 드라마센터

서울예대의 전신…'이호재의 동지' 신구·전무송 등 배출

이호재는 극작가·연출가 동랑 유치진 선생이 전문 연극인 양성을 위해 1962년 설립한 연극 전용 극장 ‘드라마센터’ 부설 ‘한국연극아카데미’(현 서울예술대 전신) 1기 졸업생이다. 신구, 전무송, 민지환, 반효정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그와 동기다. 극작가·연출가 윤대성, 오태석, 노경식 등도 같은 기수로 함께 공부했다. 당시 이해랑·이원경·여석기 등 쟁쟁한 연극인들이 이들을 가르쳤다.

서울 예장동에 있는 드라마센터는 이들의 놀이터이자 이들을 배우로 길러내는 산실 역할을 했다.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이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는 극장이다. 이들은 드라마센터에서 한국 연극 발전에 불을 붙였다.

1970년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은 유덕형 연출의 ‘생일파티’는 신구, 이호재, 전무송 등 당시 드라마센터 주역들이 총출동한 작품이었다. 동갑내기로 각자의 매력을 발산한 이호재와 전무송은 이후 여러 연극에서 호흡을 맞췄다. 1973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대상을 받은 ‘초분’, 1974년 ‘태’, 1975년 ‘마의 태자’ 등에서 잇따라 명콤비 연기를 펼쳤다.은근히 경쟁심도 들었을 것 같다. 두 사람의 ‘팬층’은 서로 달랐다. 이호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송이와 공연하면 연극이 끝난 뒤 꽃다발 든 여성 관객들은 죄다 무송이한테 몰려갔어요. 나한테는 소주나 한잔하자는 시커먼 사내들만 쫓아왔지요. 하하.”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