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맞선 보러 가던 '올드타운' 중구…역사·문화 입고 젊어져

대한민국 중구 스토리

1990년대 신도시·부도심 개발 붐에 전국 구(舊)도심 중구 쇠락의 길 걸어
서울로7017·울산큰애기야시장 등 최근 도심 재생 바람 타고 부상
그래픽=한성호 기자 sungho@hankyung.com
LP판이 빼곡히 꽂힌 레코드 가게에선 메리 홉킨의 ‘지나간 시절(Those Were The Days)’이 연신 흘러나온다. 대한극장, 제일극장 등 지역은 달라도 이름은 비슷한 극장 앞에는 팔짱 낀 연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늘어선 상가 한쪽에는 여지없이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이 있다.

1980년대 어느 도시라 할 것 없이 대한민국 중구 시내의 모습이다.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려면 또는 맞선을 보려면 가야 했던, 갈 수밖에 없던 ‘1번지’였다. 그랬던 중구가 쇠락한 건 1990년대 대도시마다 신도시 또는 부도심 개발 붐이 일면서다. 그로부터 20년, 대한민국 중구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근현대사의 상징을 그대로 간직한 구(舊)도심의 ‘뼈대’에 젊은 세대를 겨냥한 문화·예술이라는 ‘옷’이 입혀지고 기업들이 힘을 보태면서다.호텔 수 5년 만에 4배…‘관광중심’ 서울 중구

서울 한복판 중구의 면적은 9.97㎢로 서울 25개 자치구 중 가장 작다. 상주인구도 12만5000여 명으로 가장 적다. 하지만 이 조그만 중구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말 그대로 서울, 아니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 관공서와 상가, 금융가, 언론사가 밀집해 있던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은 강남, 일산·분당 신도시 개발과 때를 같이한다.

상업, 금융, 행정 등 중추 기능을 빼앗긴 중구는 도심 재생의 ‘고리’를 문화·역사 관광에서 찾았다. 중구의 하루 유동인구는 1100만여 명,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81%가 명동, 동대문, 남산 등을 찾는다. 중구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해 호텔 객실 수를 대폭 늘렸다. 2012년 25개에 불과하던 호텔은 올해 106개로 늘었다. 잠잘 곳이 늘자 관광객의 체류 시간도 늘면서 명동과 남대문은 관광 필수코스가 됐고 상권에는 생기가 돌았다. 지난 5월 개장한 서울역고가 ‘서울로7017’과 내년에 완공돼 한국 가톨릭의 성지가 될 서소문역사공원에 대한 기대도 크다.구한말 근대 신문물 유입의 흔적을 관광상품화한 ‘정동야행’, 낡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여행 프로그램 ‘을지유람’도 이미 전국구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았다.

면(麵)으로 면(面) 세우는 인천 중구

19세기 후반 개항기 인천 중구는 근대 문물의 유입 통로이자 지역경제의 견인차였다. 한국 최초의 축구대회(1882년)가 열린 곳도, 국내 최초의 호텔(대불호텔·1888년)이 들어선 곳도 인천 중구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국내 첫 사이다공장(인천탄산·1905년)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구는 인천의 심장이었다.하지만 1985년 인천시청이 새로 조성된 구월동 신시가지로 옮긴 이후 인천투자금융, 경기은행 등이 잇따라 중구를 뜨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인천 중구는 먹거리를 통한 도심 재생에 나섰다. 먹거리 중에서도 ‘면(麵)’이다. 인천 중구는 짜장면·쫄면·세숫대야 냉면의 원조라는 점에 착안해 내년 7월 ‘아시아 누들 타운’을 건립할 계획이다. 면 요리 전문점 외에 요리학교, 박물관까지 열어 국내외 관광객을 유인하겠다는 전략이다. 인근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 차이나타운과의 시너지효과도 기대된다.

‘베드타운의 재발견’ 울산 중구의 역발상울산에는 4개 구(중구 남구 동구 북구)와 1개 군(울주군)이 있다. 대표적 중공업 도시지만 5개 구·군 가운데 중구에만 공단이 없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 남구에 현대·롯데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그나마 유지하던 도심 기능도 약해져 전형적인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울산 중구 도심재생의 키워드는 ‘야시장’이다. 낮에 일터에 나갔다가 밤에 사람들이 몰리는 베드타운의 단점을 역이용한 아이디어다. 역발상은 적중했다. 중앙전통시장에 마련한 ‘울산큰애기야시장’은 그야말로 히트상품이다. 지난해 말 문을 연 이곳은 개장 100일 만에 150만여 명이 찾았다. 이 같은 성공에는 한국석유공사, 한국산업인력공단 등 10여 개 공공기관이 이전한 우정혁신도시도 한몫했다.

‘롯데의 도시’ 기업이 힘 실어준 부산 중구

부산 중구는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 중심지였다. ‘부산의 명동’이라 불린 광복동과 남포동, 1970~1980년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던 용두산공원, 자갈치시장 등이 모두 중구에 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부산 중구도 시청 이전에 따른 타격이 컸다. 1998년 시청이 연제구로 옮겨가고, 2000년대 들어서는 해운대구가 부산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부활을 꿈꾸는 부산 중구에 힘을 실어준 것은 옛 시청 자리에 들어선 롯데백화점(광복점)이다. 2009년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인근 용두산공원과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등을 잇는 관광루트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남포동 일대에서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여전히 지역경제의 버팀목이다.

‘젊음의 거리’로 노화 늦추는 대전 중구대전 중구 인구는 25만여 명, 1989년 31만여 명에서 6만 명 넘게 줄었다. 이 역시 1990년대 둔산 신도시가 생기면서 시청, 법원, 검찰청 등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대전 중구는 도심의 노화 속도를 늦추기 위해 ‘거리 리모델링’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말 25억원을 들여 대전극장과 제일극장 거리 500m 구간에 파노라마 가로등을 설치해 ‘커플존 거리’를, 올해는 50억원을 들여 옛 충남도청 뒷길 일대에 ‘예술과 낭만의 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백승현 기자/전국 종합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