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아르헨티나의 한인 백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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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아르헨티나 이민단 13가구 78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것은 1965년 10월14일. 네덜란드 화물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한 지 두 달 만이었다. 이들은 남서쪽으로 1100㎞ 떨어진 라마르케까지 이동했다. 허허벌판이었다. 천막을 치고 풀을 뜯으며 연명했다. ‘소가 먹는 풀을 먹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소리도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꼬르헨띠노’의 출발은 그랬다. 토양이 거칠어 호미나 괭이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결국 하나둘 짐을 싸 대도시로 떠났다. 무일푼으로 일용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빈민가에 터를 잡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중 한 곳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라보보에 있는 한인촌이다. 109번 버스 종점이어서 109거리로 불리다가 109촌, 백구촌(百九村)으로 굳어진 코리아타운.작은 기적은 ‘자수(刺繡) 아줌마’로부터 시작됐다. 고국을 떠나기 전 1주일간 자수를 배운 한 아주머니가 그 솜씨로 하루 만에 열흘치 수익을 올린 것이다. 그는 동네 여인들을 모아 자수를 가르쳤다. 백구촌이 활력으로 들썩거렸다. 얼마 뒤 이들은 유대인이 잡고 있던 아르헨티나 최대 의류도매상가 아베야네다까지 장악했다. 이곳 가게 2800여 개의 절반 이상은 한인이 운영한다. 대로변 가게는 90%가 한인 차지다. 브라질로 간 사람들이 상파울루 봉헤치루에서 남미 최대 의류시장을 일군 것과 닮았다.
고국의 섬유산업 발전으로 교역이 늘면서 생활은 더 윤택해졌지만 아픔도 있었다. 1994년 인접국 이민자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한인 가내공장에서 일하던 볼리비아 여성이 ‘노예노동’을 주장하는 바람에 생긴 갈등이었다. 최근엔 한인에게 봉제업을 배운 볼리비아인들이 저가 시장을 치고 들어오고 있다. 중국산까지 밀려든다. 그래서 제품 차별화와 사업 다각화로 출구를 모색하는 중이다.
후손들은 1세대의 압축성장을 발판으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민 반세기 만에 정부 고위직에 오른 인물도 나왔다. 지난해 문화부 차관보가 된 안토니오 변겨레. 그의 부모 역시 삯바느질로 시작한 1세대다. 2008년 불기 시작한 한류 바람도 반갑다. 현지 팬클럽 1만3000여 명이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TV 방영 청원운동을 펴 전국에 방송했다. 지난해에는 ‘전자정부 최우수국’인 한국을 벤치마킹하겠다며 아르헨티나 정부가 서울에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 ‘순풍’을 의미한다. 낯선 이민선을 타고 와 ‘백구촌의 기적’을 일으킨 ‘꼬르헨띠노’들의 앞날에도 순풍이 가득하길 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