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근로조건, 임금보다 일자리가 더 중요하다

"노동개혁과 기술혁신으로 일자리 해외유출 막은 독일
한국 최저임금 인상 속도 너무 빨라 자동화·공장 해외이전 가능성 커
근로자 정규직화와 함께 노동의 전문성 높이는게 중요"

노대래 < 법무법인 세종 고문, 전 공정거래위원장 >
약 20년 전 주독일대사관 재경관으로 근무할 때다. 독일 금속노조(IG-Metall)가 주 38시간의 근로시간을 주 35시간으로 줄이자고 주장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호황을 구가한 독일 철강산업도 한국의 포스코 등 신생회사들에 밀려 1980년대 중반에는 고용이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다.

독일 금속노조는 철강산업의 사회화와 임금 완전보장 조건 아래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했다. 근로시간 단축 요구는 매번 반복됐지만, 사용자 측은 복지 증진 차원에서 가급적 이를 수용하려고 생산성 향상 투자를 지속해왔다. 전후 복구와 수출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노사가 합심하는 독일 경제의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당시는 세계적으로 벤처붐이 한창일 때였다. 같은 금속노조에 속해 있었지만 벤처기업들은 주 50시간 이상 근무가 비일비재한데, 주 35시간은 너무 동떨어진 얘기라는 평가가 나왔다. 또 프랑스가 주 37시간으로 줄이자 경쟁력이 약해졌다는 실증적인 주장도 제기됐다. 사용자 단체들도 주 38시간 이하로 내려가면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주 37시간 내외가 노동의 인간화와 기계화를 결정하는 변곡점이었던 것 같다.

또 1990년대 중반, 통일 직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도 노조 요구 거절에 한몫했다. 통일연대세 신설과 각종 부담금 증액이 기업 경영에 애로였다. 기업들은 임금이 싼 인도네시아, 중국 등으로 눈을 돌렸다. 연방경제부는 한 번 해외로 나간 일자리는 돌아오기 어렵다는 시각에서 독일 경제발전진단평가위원회(일명 5현위원회)에 경쟁력 상황 분석을 요청했다. 이 위원회는 1994년 11월 노동 및 복지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정책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가 훗날 ‘하르츠 개혁’이나 ‘아젠다 2010’의 모태가 됐다고 본다.

당시 5현위원회 위원장이던 동게스 쾰른대 교수는 “일자리 해외 유출을 방지하려면 독일이 전통적으로 강한 정밀가공산업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로 나가면 당장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경제성장과 더불어 그 나라의 인건비도 오르기 때문에 종국적인 경쟁력은 기술 혁신과 지배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일자리 해외 유출 방지는 “독일에 남는 것이 기술경쟁력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되게 만드는 것”이란 주장이다.요즘 한국에서도 시간당 최저임금이 화두다.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은 필요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보조금을 줘서라도 최저임금을 맞춰 가야 하는지, 최저 이상의 임금수준을 최저임금으로 획정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조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노동의 인간화는 기업에 수익이 발생해 고용이 계속될 때 가능하다. 임금을 한 번 인상한 뒤 기계화를 추진한다든지, 해외 투자로 전환한다면 일자리가 사라진다. 20년 전 독일과 달리 지금은 반도체 기술과 부품 소형화로 공장 자동화와 로봇 대체 비용이 저렴하다. 공장 자동화와 스마트 공장이 비용을 꼭 절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인건비보다 전력요금이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우리 경제를 위해서는 노동의 인간화와 함께 일자리를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며칠 전 경기 부천에 있는 한 콜센터를 방문했다. 층별로 1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헤드폰과 단말기로 일하고 있었다. 널찍하게 마련된 휴식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고객의 영업 비밀과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약 9000명의 직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뽑고 출입 통제도 정부청사만큼이나 엄격했다. 콜센터가 소비자의 불만을 처리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주문, 배송, 구매, 영업 등 모든 업무를 위탁처리해 주고 있었다. 개별회사 안에 있으면 고임금과 전문성 결여로 머지않아 사라질 업무인데, 이를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하니까 비용 절감과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새로운 일자리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라질 일자리를 지키면서 저임금을 고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노동의 전문화야말로 노동의 인간화보다 상위 정책이라 생각한다.

노대래 < 법무법인 세종 고문, 전 공정거래위원장 dlnoh@shink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