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채플린 영화 본 히틀러, 선동연설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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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강력한 권세와 권위주의로 무장한 권력자에게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가 막강할수록 무력이나 정치적 세력으로 맞서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해법은 권력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데 있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기보다 비웃게 하는 것이다.
오노 히로유키 지음 / 양지연 옮김 / 사계절 / 352쪽│1만6800원
20세기를 대표하는 익살꾼 찰리 채플린이 당대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대항한 무기도 풍자였다. 채플린이 각본과 제작을 맡고 직접 출연해 1940년 개봉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그 결정체다. 채플린의 방랑 신사 캐릭터 ‘찰리’와 히틀러가 공교롭게도 같은 모양의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점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극중 독재자 힌켈이 과장된 억양의 엉터리 독일어로 연설하는 장면, 힌켈이 히틀러가 평소 좋아했다는 바그너 오페라를 들으며 지구본을 갖고 노는 장면 등으로 히틀러의 권위를 뒤흔들었다. 얼떨결에 힌켈로 분한 유대인 이발사가 영화 말미에서 6분간 쏟아내는 연설은 세계에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일깨웠다.《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은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 과정을 좇으며 채플린과 히틀러가 미디어라는 ‘이미지 전쟁터’에서 벌인 대결을 추적한다. 일본 채플린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극작가 오노 히로유키가 썼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실의에 빠진 독일 민중의 심리에 성공적으로 올라탄 정치인이었다. 뛰어난 선전술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기대를 심어주는 능력이 탁월했던 그는 연설과 영화 등 미디어를 무기로 자신의 힘을 키웠다. 영화로 당대를 비추며 인간의 인간됨을 자극하는 채플린은 히틀러와 나치에게 눈엣가시였다. 나치는 채플린을 유대인이라고 몰아붙이며 그를 탄압했다. ‘위대한 독재자’ 제작 소식을 들은 뒤엔 미국 정부를 압박해 영화 제작을 무산시키려 했다.
채플린이 손에 든 무기는 단 하나, ‘웃음’이었다. 채플린은 당시 “지금처럼 세상에 웃음이 절실한 때는 없었다”며 “이런 시대에 웃음은 광기에 대항하는 방패”라고 말했다. 1940년 ‘위대한 독재자’ 개봉 이후 1941년 2월 말 기준 세계에서 3000만 명이 관람했다. 채플린의 익살과 풍자는 희대의 미디어 선동가 히틀러에게서 그 무기를 빼앗았다. 1932년엔 비행기를 타고 하루에도 서너 곳을 방문하며 연설하던 히틀러는 영화 개봉 다음해인 1941년엔 7회, 1942년엔 겨우 5회만 대중 연설에 나섰다.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이던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거리로 나가 국민을 고무하라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미지가 조롱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독재자의 야망은 무너지고 채플린의 웃음이 살아남았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