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대사관에 막힌 덕수궁 돌담길, 60년만에 열려

끊겼던 170m 구간 중 100m…나머지 구간 개방 '숙제로'
주한 영국대사관이 자리해 60년간 끊겼던 덕수궁 돌담길 170m 중 100m 구간이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서울시는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대사관 직원 숙소 앞까지 이어지는 100m 구간을 보행 길로 개방한다고 30일 밝혔다.

폭이 좁은 이 길은 과거 고종과 순종이 제례 의식을 행할 때 주로 이용했다.

덕수궁에서 선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경기여고 터)으로 들어가거나 러시아공사관, 경희궁으로 갈 때 거치는 길목이기도 했다.그러나 영국대사관이 1959년 서울시 소유의 땅을 점유해 철대문을 설치하면서 시민들이 드나들 수 없게 됐다.

새로 개방한 돌담길은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옆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다.

돌담길을 찾은 시민 정석근(74)씨는 "15∼16살쯤 호기심에 몰래 담장을 넘어본 뒤 이곳을 찾는 게 처음"이라며 "막혔던 길이 뚫리니 가슴도 뻥 뚫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디.
이번에 100m 구간은 서울시 소유라 개방하게 됐지만, 나머지 70m(대사관 정문∼직원 숙소)는 1883년 4월 영국이 매입한 땅이라 개방 대상에서 빠졌다.이에 따라 아직은 경복궁처럼 돌담을 따라 덕수궁 둘레 1.1km를 한 바퀴 돌 수 없다.

하종현 서울시 도로계획과장은 "영국대사관과 끊겨있는 70m 구간에 대한 협의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방에 앞서 서울시는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보행로를 정비하고, 덕수궁 담장을 보수했다.이 길은 대한문에서 정동으로 이어지는 서소문 돌담길보다 담장이 나직나직하고 곡선이 많다.

담장 너머로는 영국식 붉은 벽돌 건물이 보여 전통과 서구 건축이 조화를 이룬다.
덕수궁에는 개방된 돌담길과 바로 이어지는 후문이 새로 생겼다.

담장을 은은하게 밝히는 가로등도 설치돼 야간에도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고종의 길(덕수궁길∼정동공원)'이 연내 완성되면 덕수궁에서 돌담길을 거쳐 정동길까지 쭉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이번 개방은 서울시가 2014년부터 끈질기게 영국대사관의 문을 두드려 이뤄졌다.

서울시는 2014년 10월 영국대사관에 '덕수궁 돌담길 회복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자고 제안했고, 그해 11월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대사관을 찾아가 주한영국대사를 만났다.

이후 2015년 5월부터 대사관 보안 문제 등 개방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날 오전 열린 돌담길 개방식에는 박원순 시장과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 등이 참석해 새로 단장한 길을 걸었다.

'돌담길의 귀환'을 축하하는 공연에선 한국을 대표하는 판소리와 영국의 백파이프 소리가 어우러졌다.

영국 근위병과 우리 수문장이 동시에 길목을 지켰다.

박 시장은 "60년간 일반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단절의 공간으로 남아 있던 덕수궁 돌담길을 서울시와 영국대사관의 협력 끝에 드디어 시민 품으로 돌려주게 됐다"며 "덕수궁 돌담길이 온전히 연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건 길이 끊어져서 그랬던 것 같다"며 "이제 함께 걸으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 길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헤이 대사는 "1960년대에 어떤 이유에선지 도로 점유 계약 갱신을 하지 않게 된 이후 이 길이 영국대사관 소유라고 생각하게 됐다"며 "서울시 소유 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공식 반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chopark@yna.co.k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