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3000개가 넘는 가능성'…섬은 한국 미래의 희망

하루 숙박료 8만달러의 카리브해 네커섬과
안도 다다오의 '예술섬' 일본 나오시마처럼
섬 특성 따른 디자인으로 스토리 입혀야

강철희 < 홍익대 교수·건축공학 >
서울을 잠시 떠나 남해안을 둘러보고 왔다. 울퉁불퉁 해안선을 따라 차를 몰며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리고 그 수려한 품에 흩뿌려진 듯 총총한 섬들이 이룬 절경에 빠져 그야말로 황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객선이 들고 나는 항구에 닿을 때마다 아무 배나 잡아타고 섬에 들어가 그 평온한 적막감을 하룻밤이라도 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숙소에 돌아와 TV를 켜니 마침 젊은이들의 섬 체험을 다룬 프로그램이 나왔다. 어느 섬집에 앉아 삼시세끼 밥 차려 먹는 모습이 전부인데도 어느새 빠져들게 된다. 출연자들이 애써 재미를 만들려 들지 않아도 남해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그 섬의 장소성이 이미 우리를 매료시킨 까닭이다.세계적으로 섬 건축, 그리고 섬 자원의 활용은 큰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섬 전체를 단독으로 즐길 수 있어 ‘프라이빗 아일랜드’로 불리는 섬 리조트는 더 이상 실리콘밸리의 거부들이나 할리우드 스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프라이빗 아일랜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카리브해 네커 아일랜드는 영국 버진그룹의 창립자 리처드 브랜슨이 1978년 겨우 18만달러에 손에 넣었다. 오늘날 물가로 환산해도 7억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최대 34명의 게스트를 위해 60여 명의 스태프가 서비스하는 네커 아일랜드의 빌라형 리조트는 하룻밤 숙박료가 무려 8만달러에 이른다. 각국의 명사와 셀럽들이 앞다퉈 아지트로 삼은 것은 물론이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위기로 중국인 관광객(유커)의 발걸음이 뚝 끊겨 울상이라는 한국 관광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섬의 고립성 덕분에 가능한 프라이버시 보장과 청정한 자연환경으로 초고부가가치 관광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VVIP를 위한 럭셔리 리조트만이 답은 아니다. 인구 3000여 명의 버려진 섬에 건축과 예술을 심어 기적을 일궈낸 일본 나오시마는 불과 10여 년 만에 한 해 수십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급부상했다. 일본 최대 출판교육기업 베네세그룹과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의기투합해 만든 이 예술의 섬은 유유자적의 공간인 섬에 여유가 있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거장들의 작품을 담은 통찰이 낳은 명작이다.

도쿄의 안정된 대기업 일자리를 박차고 나와 시마네현의 작은 섬 아마를 멋진 도전의 터전으로 삼은 두 일본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베 히로시와 노부오카 료스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고령화, 인구유출, 재정파탄의 위기에 놓였던 아마 섬으로 들어가 섬 학교를 세웠다. 논농사와 낚시 등 섬에서 할 수 있는 각종 체험에 강연이벤트 콘텐츠를 더해 섬 전체를 인생 리더십의 학교로 조성한 그들에게 섬은 여가와 휴식의 장소를 넘어 새로운 일본의 희망을 세우는 공간이었던 것이다.한국에는 30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섬의 공간과 자원을 활용하는 데에는 아직 연구와 개발의 역사가 일천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시도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섬테크’ 열풍이 뜨거웠다 한동안 시들해진 뒤 최근 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단기간의 개발 시세 차익을 꿈꾸며 섬에 가서는 곤란하다. 섬 건축은 육지에서의 일반적인 개발보다 더 많은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섬의 고립성은 우리가 섬을 찾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지만, 반대로 그 고립성 때문에 기본적인 기반시설과 접근성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너지와 식수 등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섬 환경의 특성에 맞춘 기술과 디자인으로 풀어낸다면 그 자체로 섬을 찾게 만드는 스토리가 될 수 있다. 무인도가 아니라면 섬 주민의 삶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기획이 모든 섬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파도에 울렁이는 뱃길이 그러하듯 섬은 분명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콘텐츠 고갈로 관광이든 제조업이든 성장 한계에 다다른 오늘의 현실에서 섬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희망이 될 수 있다. 3000개가 넘는 가능성, 그것이 당장 배를 타기에 충분한 이유이지 않을까.

강철희 < 홍익대 교수·건축공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