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 물러나라는 서울대 교수 대자보 속에 자리잡은 암투… 규장각에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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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님 이제 그만 사퇴하십시오”
지난 4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엔 성낙인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한 국사학과 교수의 실명 대자보가 붙어 화제가 됐다. 대자보를 붙인 오수창 국사학과 교수는 학생들과의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의 난맥상을 총장 사퇴의 첫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그가 정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사안은 인사였다. 그는 서울대 본부가 규장각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정인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로 재임용한 것을 두고 “무엇을 근거로 (본부가) 규장각과 인문대의 각기 두 차례에 걸친 재임용 불가 의견을 뒤집으셨습니까”라고 반발했다. “문제 교수의 연구성과가 결격”이고 “그 내용이 규장각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란 게 그가 밝힌 재임용 불가 이유다.논란의 주인공은 2013년 임용된 김시덕 교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한반도의 사활을 건 미래 전략을 짜는 데 있어 필독서가 될 것”이라 평한 베스트셀러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의 저자인 김 교수는 국내 대표적 일본 고문헌 전문가로 꼽히는 젊은 연구자다. 주기적으로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통도 활발하다. 이처럼 역사학계에 보기드문 스타 교수가 ’결격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의 내막엔 소위 ’튀는‘ 아웃사이더(외부자)에 배타적인 규장각과 서울대 국사학과의 학풍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같은 논문인데 평가 천차만별…본부 “객관성 결여”
본지는 오 교수 대자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쟁점은 첫째 김시덕 교수의 연구 성과가 대자보의 문언 그대로 결격인지, 둘째 규장각과 인문대의 결정을 본부가 뒤집는 과정에서 성낙인 총장이 부당하게 개입했는지 여부다. 결론은 둘다 아니오였다.인사 과정에 참여한 다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김 교수의 연구실적이 모자라다는 오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인문한국(HK) 조교수였던 김 교수가 재임용되기 위해선 4년간 연구실적물이 400%가 넘어야 한다. 서울대에 따르면 김 교수는 대상 기간 중 주저자로 6개의 논문을 써 600%를 달성했다.논문의 질이 평균적으로 수우미양가로 따졌을 때 ‘우’ 이상 돼야 한다는 서울대 내부 기준도 충족했다. 평가 결과 김 교수의 논문 6개 가운데 5개가 ‘우’, 1개가 ‘미’ 판정을 받았다. 본부 관계자는 “재임용 기준인 400%에 해당하는 4개 이상의 논문이 ‘우’등급 이상이라 재임용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본부 측은 성낙인 총장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 제기도 근거가 없다고 해명했다. 서울대의 교수 채용 절차는 학과(부) 또는 연구소, 단과대학, 본부의 3단계를 거쳐 이뤄진다. 본부 인사위원회는 총장이 아닌 교무처장을 위원장으로, 서울대 내 17개 단과대 학장들이 위원으로 참여한다.올초 규장각과 인문대 인사위원회는 김 교수를 결격자로 규정하고 채용 반대 의견으로 해당 채용건을 본부 인사위원회에 올렸지만 반려됐다. 처음엔 김 교수의 6개 논문 중 3개가 ‘미’ 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세부 심사결과가 수상했다. 같은 논문을 두고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수’에서 ‘가’까지 극명하게 갈렸다.
본부 인사위는 인문대 인사위 측에 “김 교수 논문에 대한 평가점수를 신뢰할 수 없다”며 ”논문을 다시 평가해 다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한 본부 인사위원은 “평가의 공정성이 의심되는 결과였다”며 “과거 비슷한 사안에서 서울대가 재임용을 거부했다가 해당 교수가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학교 측이 패소한 전례가 있다는 점도 규장각 측에 분명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재평가 결과 ‘우’등급 논문이 3개에서 5개로 늘었다. 재임용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 본부는 학장 등 인사위원들의 표결을 거쳐 재임용 결정을 내렸다.
◆일본 문헌 연구하면 무조건 ‘친일’인가이번 논란에서 뿌리 깊은 서울대 순혈주의와 배타성이 고스란히 노출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출신인 김 교수는 일본과 한국의 고문헌을 통해 양국의 교류사를 연구해왔다.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010년 펴낸 일본어로 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로 이듬해 40세 이하 고문헌연구자에게 수여하는 권위있는 학술상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받았다. 2015년엔 한국 동방문학비교연구회가 주는 ‘석헌학술상’까지 받아 한·일 양국 학계에서 나란히 연구성과를 인정 받았다.
본인만의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대중적 인기까지 겸비했지만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주류를 이루는 전통적인 국사학 연구자들 입장에서 김 교수가 달갑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란 게 사태를 가까이서 지켜본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다. 인문대 A교수는 “정식 교수가 아닌 HK(인문한국)연구교수로 임용된 후 외부기고, SNS에 열심이었던 김 교수를 안좋게 보는 시각이 많았다”며 “서울대 국사학과 내 주류는 아직까지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학풍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내 문헌을 근거로 들어 이를 지적하는 김 교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 동료 교수들의 시선도 싸늘하다. 단과대 학장을 지낸 B교수는 “규장각이나 인문대에서 내린 합리적인 판단을 본부 측에서 근거 없이 좌지우지했다면 문제지만 이번 사건은 주류의 생각과 다른 외부자의 시각을 배척하고 출신성분이 다르단 이유로 차별한 사건”이라며 “사관이나 접근법의 차이는 학문적 논쟁을 통해 해결할 일이지 이렇게 한 명의 연구자를 연구소 또는 학과 전체가 따돌림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인문대 C교수도 “김 교수의 임용을 반대하는 측에선 그의 연구에 ‘친일’ 딱지를 붙였는데 일본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한 것과 일본 측에 서서 연구한 것은 다르지 않나”라며 “이번 사건은 세계 속의 한국학 연구소를 지향하는 규장각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지난 4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엔 성낙인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한 국사학과 교수의 실명 대자보가 붙어 화제가 됐다. 대자보를 붙인 오수창 국사학과 교수는 학생들과의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의 난맥상을 총장 사퇴의 첫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그가 정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사안은 인사였다. 그는 서울대 본부가 규장각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정인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로 재임용한 것을 두고 “무엇을 근거로 (본부가) 규장각과 인문대의 각기 두 차례에 걸친 재임용 불가 의견을 뒤집으셨습니까”라고 반발했다. “문제 교수의 연구성과가 결격”이고 “그 내용이 규장각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란 게 그가 밝힌 재임용 불가 이유다.논란의 주인공은 2013년 임용된 김시덕 교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한반도의 사활을 건 미래 전략을 짜는 데 있어 필독서가 될 것”이라 평한 베스트셀러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의 저자인 김 교수는 국내 대표적 일본 고문헌 전문가로 꼽히는 젊은 연구자다. 주기적으로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통도 활발하다. 이처럼 역사학계에 보기드문 스타 교수가 ’결격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의 내막엔 소위 ’튀는‘ 아웃사이더(외부자)에 배타적인 규장각과 서울대 국사학과의 학풍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같은 논문인데 평가 천차만별…본부 “객관성 결여”
본지는 오 교수 대자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쟁점은 첫째 김시덕 교수의 연구 성과가 대자보의 문언 그대로 결격인지, 둘째 규장각과 인문대의 결정을 본부가 뒤집는 과정에서 성낙인 총장이 부당하게 개입했는지 여부다. 결론은 둘다 아니오였다.인사 과정에 참여한 다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김 교수의 연구실적이 모자라다는 오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인문한국(HK) 조교수였던 김 교수가 재임용되기 위해선 4년간 연구실적물이 400%가 넘어야 한다. 서울대에 따르면 김 교수는 대상 기간 중 주저자로 6개의 논문을 써 600%를 달성했다.논문의 질이 평균적으로 수우미양가로 따졌을 때 ‘우’ 이상 돼야 한다는 서울대 내부 기준도 충족했다. 평가 결과 김 교수의 논문 6개 가운데 5개가 ‘우’, 1개가 ‘미’ 판정을 받았다. 본부 관계자는 “재임용 기준인 400%에 해당하는 4개 이상의 논문이 ‘우’등급 이상이라 재임용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본부 측은 성낙인 총장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 제기도 근거가 없다고 해명했다. 서울대의 교수 채용 절차는 학과(부) 또는 연구소, 단과대학, 본부의 3단계를 거쳐 이뤄진다. 본부 인사위원회는 총장이 아닌 교무처장을 위원장으로, 서울대 내 17개 단과대 학장들이 위원으로 참여한다.올초 규장각과 인문대 인사위원회는 김 교수를 결격자로 규정하고 채용 반대 의견으로 해당 채용건을 본부 인사위원회에 올렸지만 반려됐다. 처음엔 김 교수의 6개 논문 중 3개가 ‘미’ 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세부 심사결과가 수상했다. 같은 논문을 두고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수’에서 ‘가’까지 극명하게 갈렸다.
본부 인사위는 인문대 인사위 측에 “김 교수 논문에 대한 평가점수를 신뢰할 수 없다”며 ”논문을 다시 평가해 다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한 본부 인사위원은 “평가의 공정성이 의심되는 결과였다”며 “과거 비슷한 사안에서 서울대가 재임용을 거부했다가 해당 교수가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학교 측이 패소한 전례가 있다는 점도 규장각 측에 분명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재평가 결과 ‘우’등급 논문이 3개에서 5개로 늘었다. 재임용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 본부는 학장 등 인사위원들의 표결을 거쳐 재임용 결정을 내렸다.
◆일본 문헌 연구하면 무조건 ‘친일’인가이번 논란에서 뿌리 깊은 서울대 순혈주의와 배타성이 고스란히 노출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출신인 김 교수는 일본과 한국의 고문헌을 통해 양국의 교류사를 연구해왔다.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010년 펴낸 일본어로 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로 이듬해 40세 이하 고문헌연구자에게 수여하는 권위있는 학술상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받았다. 2015년엔 한국 동방문학비교연구회가 주는 ‘석헌학술상’까지 받아 한·일 양국 학계에서 나란히 연구성과를 인정 받았다.
본인만의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대중적 인기까지 겸비했지만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주류를 이루는 전통적인 국사학 연구자들 입장에서 김 교수가 달갑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란 게 사태를 가까이서 지켜본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다. 인문대 A교수는 “정식 교수가 아닌 HK(인문한국)연구교수로 임용된 후 외부기고, SNS에 열심이었던 김 교수를 안좋게 보는 시각이 많았다”며 “서울대 국사학과 내 주류는 아직까지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학풍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내 문헌을 근거로 들어 이를 지적하는 김 교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 동료 교수들의 시선도 싸늘하다. 단과대 학장을 지낸 B교수는 “규장각이나 인문대에서 내린 합리적인 판단을 본부 측에서 근거 없이 좌지우지했다면 문제지만 이번 사건은 주류의 생각과 다른 외부자의 시각을 배척하고 출신성분이 다르단 이유로 차별한 사건”이라며 “사관이나 접근법의 차이는 학문적 논쟁을 통해 해결할 일이지 이렇게 한 명의 연구자를 연구소 또는 학과 전체가 따돌림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인문대 C교수도 “김 교수의 임용을 반대하는 측에선 그의 연구에 ‘친일’ 딱지를 붙였는데 일본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한 것과 일본 측에 서서 연구한 것은 다르지 않나”라며 “이번 사건은 세계 속의 한국학 연구소를 지향하는 규장각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