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벌의 탄생 해체 부활의 시사점 … 시사일본경제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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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 원조, 일본 재벌의 탄생 해체 부활 … 시사일본어학원· 한경닷컴
재벌은 일본경제 발전 역사, 후계 경영자들의 역량이 그룹 흥망성쇠 결정
미쓰비시그룹, 시대 흐름 타고 거대 기업 성장 '강한 조직력과 단결력' 자랑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 ‘재벌’(財閥)의 원조는 일본이다. ‘재벌’이란 용어는 메이지시대 중반 야마나시현 출신의 사업가들이 단결해 업계에서 선풍을 일으키자 일본 언론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재벌’은 “같은 현(한국의 도에 해당) 출신의 기업가 집단”을 의미했다. 메이지시대 중기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이 ‘재벌’로 불렸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이들 경제집단을 가르키는 말로 ‘재벌’ 용어가 정착됐다. 일본경제사 연구가인 모리카와 히데마사는 재벌에 대해 “부호의 가족, 동족의 폐쇄적인 소유, 지배 아래 성립된 다목적 사업체”로 정의했다.
요즘도 일본에서는 동족적인 다각적 사업체들 가운데 지방에 정착해 지방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기업집단을 ‘지방 재벌’로 지칭하고 있다. 단행본 ‘일본의 재벌<요센(洋泉)사>의 내용을 소개한다.## 근대 일본을 만든 재벌, 그들은 누구인가 ##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세계인들이 놀랄 정도의 빠른 스피드로 근대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파란만장한 시대를 대담한 행동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살았던 기업가들이다.
당대에 기업을 일으켜 거대 재벌그룹으로 성장한 미쓰비시와 야스다, 에도시대부터 거대 상인 가문에서 발전한 미쓰이, 스미토모. 흔히 4대 재벌로 불리는 이들 전통 기업으로부터 시멘트 목재 광산 증권 등에 특화해 급성장한 신흥 재벌, 그리고 도요타자동차 등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있다. 일찍부터 일본에선 ‘4대 재벌’로 불리는 재벌이 존재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야스다를 지칭한다. 메이지유신 후 급성장해 일본 경제를 키운 이들 기업은 어떻게 형성됐고 성장해 왔을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의 길을 걸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일본 경제의 성공을 이끈 거대 재벌의 창업과 성공, 장수 비결을 찾아본다. 메이지유신과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고도 경제 성장기, 장기 침체기 등을 거치며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장수하고 있는 일본 재벌들의 성장과 생존, 쇠퇴 등 흥망성쇠는 치열한 글로벌 생존 경쟁 속에 활로를 찾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 일본 재벌의 탄생과 종류 ##
재벌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메이지유신 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과 산업융성’을 국시로 내걸었다. ‘미국과 유럽을 쫓고, 미국과 유럽을 추월하자’를 슬로건으로 삼아 근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일본 정부는 각종 산업은 물론 금융, 정보, 인프라 정비도 서둘렀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타고 부를 쌓아 일본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주역이 바로 재벌들이다. 재벌은 ‘성립 방식’과 ‘업종 특징’에 따라 3개 군으로 분류된다. 먼저 성립 방식으로 세 종류로 구분한다.(1) 에도시대의 거상으로서 지위를 유지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따라 발전한 기업들이다. 미쓰이, 스미토모그룹이 대표 기업이다. (2) 에도시대 말기 또는 메이지 초기에 소규모 사업으로 시작해 20~30년에 걸쳐 재벌로 성장한 그룹이 있다. 미쓰비시, 야스다, 가와사키, 후루카와, 오쿠라, 아사노 등이다. (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성장 기업들로, 군부의 진출에 호응해 성장한 형태다. 니혼산교, 니혼짓소, 니혼소다 등이 대표 그룹이다.
업종별 특징을 기준으로 3개군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1) 상업 공업 금융 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기업을 운영하는 종합 재벌이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이 대표적이다. (2) 금융업을 주력으로 하는 금융재벌들도 있다. 야스다, 야마구치, 고노이케, 노무라그룹 등이다. (3) 특정 산업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아사노(시멘트), 후루카와(구리 광산 및 금속가공), 가와사키(조선), 니혼산교 니혼짓소 니혼소다(중공업) 등이다.
일본 재벌들은 ‘원래 손을 댔던 업종’이나 ‘발전이 예상되는 업종’을 기반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기업 창립 후 사업 전개 방식은 창업자나 경영 후계자의 판단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다. 이들 후계 경영자들의 판단이 결국 오늘날 이들 그룹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다. 이들 일본의 재벌은 규모에 따라 ‘4대 재벌’ ‘10대 재벌’ ‘15대 재벌’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 일본 재벌이 거대화한 이유 ##
재벌이 거대화한 배경에는 ‘정치 상인(政商)’ ‘광산’ ‘중공업’이 자리잡고 있다. ‘정상’들은 정치권력에 밀착해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사업을 키웠다.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국가의 자금을 위탁받은 특권 기업
(2) 정부 또는 일본 왕실의 대리 상인
(3) 정부로부터 비호를 받은 기업
첫 번째를 대표하는 기업이 ‘미쓰이’이다. 미쓰이는 미노무라 리자에몬 시절 ‘신화폐 교환 업무 대행’을 맡았다. 메이지 정부의 화폐 정책의 일익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룹을 키웠다.
두 번째를 대표하는 기업은 오쿠라. 창업자인 오쿠라 기하치로는 대만 출병과 청일전쟁 등에서 병력과 군수 물자의 수송을 맡아 커다란 부를 축적했다. 세 번째를 대표하는 기업이 미쓰비시다. 대만 출병에서 존재감을 발휘해 정부의 신뢰를 얻은 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운업을 독점했다.
하지만 모든 일본 재벌들이 ‘정치 상인’을 배경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창업자가 정치상인이라고 해도 후계자가 ‘정치 상인’에서 탈피해 회사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정치상인에서 출발한 재벌들도 광산을 소유하거나 공업화 시대의 파도를 타고 급성장했다.
<< 한국 재벌의 원조, 일본 재벌은 이렇게 해체됐다 >>
돈이 넘쳐나는 재벌이라고 해서 결코 평안하고 무사한 시기만 보낸 건 아니다. 시대 변화를 쫓지 못해 충격을 받고 사라진 재벌도 많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 재벌에 대한 첫 번째 충격파가 왔다.
전쟁 기간 중 일본 기업들은 전쟁 특수를 맘껏 누렸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자 특수로 누렸던 생산제품들이 대량으로 남아돌게 됐다. 당연히 생산에 투입됐던 자금 회수가 어려워졌다. 많은 재벌들이 경영난을 겪었다. 전쟁 특수의 반작용으로 대다수 일본 기업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구하라(久原)재벌은 ‘구하라상사’의 도산으로 기업 해체에 몰렸다. 후루카와상사의 경영 파탄은 후루카와재벌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1927년 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다.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사태의 발단은 간토대지진의 ‘어음 정리 법안’ 심의중에 시작됐다. 국회에서 대장상(기획재정부장관)의 은행파탄 관련 실언이 단초가 됐다. 많은 시민들이 예금을 찾으려고 은행으로 몰려들어 은행들이 연쇄 파산했다.
공황 상황에서 ‘스즈키상점’도 도산했다. 스즈키상점은 한때 미쓰이, 미쓰비시에 필적했던 재벌이었다. 전후 공황기의 경영 위기를 극복한 재벌들은 승자군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에 의해 재벌이 공식 해체될 때까지 생존했다.
금융공황 종료 후 재벌들 사이에선 ‘재벌 전향’ 형태로 개혁 작업이 진행됐다. 재벌들에 부가 집중된 결과 사회적으로 고조된 ‘재벌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재벌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신흥 기업진단들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 ‘신흥 재벌’로 불리는 기업이다. 독립된 기업의 주식을 모회사가 소유해 다른 회사를 지배하는 형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대약진해 군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아이카와재벌(닛산기업연합), 닛치쓰기업연합, 닛소기업연합 등은 중공업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존 재벌과 신흥 재벌들은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을 경제, 기술, 물자 공급 등으로 적극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자 연합군은 동양의 작은 나라인 일본이 어떻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에 집중했다. 특히 전쟁 자금원이 어디인지에 관심을 가졌다. 연합군 측은 “돈 많은 자산가층에 부가 집중됐고, 그들이 전쟁 수행에 협력했기 때문”으로 결론을 내렸다.
종전 후 일본의 재벌 해체가 강행된 배경이다. 재벌을 완전히 없애 일본 경제를 민주화하고, 부의 일극 집중을 막아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경제적 측면에서 저지하기 위해 재벌 해체가 진행됐다는 게 일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창업자 일족들이 일본 재벌의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 본사가 직계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이들 직계회사들이 자회사와 ‘손자회사’들을 거느리는 구조다. 이런 구조로 인해 최정상의 창업자 일족에 부가 집중되고, 배타성이 생기게 된다.
연합군의 재벌 해체 방침에 따라 재벌 본사가 독점했던 주식은 자본시장으로 흩어지게 된다. 재벌 본사가 산하 기업을 강력하게 지배하던 일본의 재벌구조도 붕괴됐다. 재벌 관련 기업들도 ‘과도 경제력 집중 배제법’에 따라 분화돼 규모가 축소됐다. 일본 재벌이 해체되는 과정이다.
<< 메이지유신 혼란기에 탄생한 일본 재벌의 원조, 미쓰비시그룹 >>
1800년대 중반 도쿠가와 막부 말기 동란기를 극복한 인물. 하층 무사에서 맨손으로 재벌로 일어선 이와사키 야타로. 정치상인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이와사키가 내다본 미쓰미시재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미쓰비시그룹의 탄생과 성장 ##
미쓰비시재벌의 성장 주역은 이와사키 야타로다. 야타로는 도사번(현 고치현)의 하층 무사 출신이다. 번의 실력자인 요시다 토요에서 배운 인연을 계기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1867년 ‘가이세이칸 나가사키상회’의 책임자로 발탁됐다.
가이세이칸 나가사키상회는 번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번 직영 상사였다. 나가사키와 오사카에 거점을 뒀다. 나가사키에 부임한 야타로는 천부적인 상인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도사번의 특산품 수출과 서양 국가들로부터 함선, 무기 수입에 분주했다. 1868년 나가사키상회의 폐쇄 결정에 따라 오사카상회로 옮겨 도사번을 위한 무역 업무에 매진했다.
1870년 오사카상회는 이름을 ‘99상회’로 바꿨다. 야타로는 오사카에서 번으로부터 매입한 3척의 배를 기반으로 해운업을 시작했다. 초기엔 도쿄~오사카, 고베~고치 간 화물 수송에 주력해 사업을 키웠다. 오사카 상인과 외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물품 매매도 했다.
메이지 정부의 번 폐지 조치로 ‘도사번’이 없어진 뒤 1873년 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개명했다. 야타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오너로 미쓰비시를 이끌게 됐다. 미쓰비시는 1874는 본사를 도쿄로 옮기면서 도약기를 맞았다. 메이지 중앙정부의 대만 출병이 회사 성장의 회사 도약의 계기가 됐다. 미쓰비시는 정부를 대신해 정잰 전략 물자 수송을 맡아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 1875년 ‘일본국 우편증기선회사’ 가 해체되면서 소유 선박은 미쓰비시로 넘어갔다.
야타로는 본사의 도쿄 이전에 맞춰 정부와의 업무 협조를 공고히하기 위해 회사 조직을 개편했다. 미쓰비시는 일본군의 조선 출병, 내전 등에도 병력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 정부의 항로 개척에도 앞장섰다. 미쓰비시가 일본의 해운을 독점하게 되는 배경이다.
야타로는 회사 운영에서 철저한 1인 독재 경영 체제를 만들었다. 1875년 제정한 사내 규정의 제 1조에는 “회사 경영의 모든 결정, 상벌 등은 사장의 독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1878년의 새 사내 규정도 ‘사장 독재’를 명기했다.
경영인으로서 야타로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그는 맹렬한 ‘1인 사장’이었으나 인재를 발탁하는 혜안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친 동생으로 미쓰비시의 2대 사장에 오른 야노스케도 비슷했다. 그는 매사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경영인이었으나 사원들을 사랑하는 온후하고 냉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야타로 초대 사장이 경영에서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이 ‘인재 등용’이었다. 그는 서양문명 도입에 열심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 심취했다. 서양 학문을 배운 학생이나 외국인을 적극 채용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초대 사장인 야타로는 미쓰비시가 근대적 기업으로 진화하는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미쓰비시는 1878년 이후 보험, 광산, 은행, 부동산 등 각종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와중에 야타로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885년 ‘우편기선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해 ‘일본우선회사’가 됐다. 미쓰비시재벌 본류 기업의 탄생을 알렸다.
## 미쓰비시: 시대 흐름을 타고 거대 기업으로 성장, 강한 조직력과 단결력 ##
일본우선회사의 설립으로 미쓰비시의 주요 사업군에서 해운업이 사라졌다. 미쓰비시의 2대 사장인 이와사키 야노스케(야타로의 친 동생)는 새로운 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회사명도 ‘미쓰비시사’로 바꿨다. 신규 사업의 주력은 다카시마탄광과 나가사키조선소였다. 다카시마탄광을 신사업의 핵심으로 삼은 야노스케는 막대한 자금을 탄광에 투자했다. 굴삭 기술의 강화와 굴삭량 증가에 힘을 쏟았다. 다카시마탄광은 품질과 생산량에서 일본 최고 광산으로 성장했다.
나가사키조선소는 메이지정부가 만든 조선소였다. 일본 정부는 1884년 민간에게 조선소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1887년 야노스케가 대장상(기획재정부장관 해당)인 마쓰카타 마사요시에게 인수를 신청해 미쓰비시의 소유가 됐다. 야노스케는 조선소에 거액을 투자해 미쓰비시조선이 세계적인 조선업체로 성장하는 초석을 놓았다.
미쓰비시는 1893년 상법 시행에 따라 합자회사로 바뀌었다. 야노스케는 이를 계기로 사장 자리를 히키야(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아들)에게 물려줬다. 3대 사장의 탄생이다. 미쓰비시는 히키야의 경영 아래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가장 돈벌이가 되는 사업은 광산업이었다. 1902년께 전국 각지에 광산과 탄광을 소유해 막대한 양의 금속과 석탄을 채굴했다.
조선업도 순조롭게 성장했다. 1899년 해군이 군함 건조를 민간에 발주하기 시작했다. 조선업계 선두인 미쓰비시는 큰 수혜을 입었다. 미쓰비시는 1905년 고베조선소를 설립했다. 최첨단 조선기술을 집적한 조선소였다. 일본 최고 조선소의 탄생이다.
## 중핵은 중공업, 세계 굴지의 신병기도 생산 ##
미쓰비시합자회사는 은행부, 영업부, 광업부 등의 사업부제를 채택했다. 독립채산제로 각 사업부가 일정 한도의 자본금을 설정했다. 사업부 책임자가 자본금 한도 내에서 책임 결재하고 경영을 하는 형태다. 이들 사업부를 분리, 독립시켜 미쓰비시를 거대 그룹으로 만든 주역이 4대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이다. 고야타는 2대 사장인 야노스케의 장남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미쓰비시합자회사 부사장을 거쳐 1916년 4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사장 취임 이듬해부터 각 사업부의 분리, 독립 작업을 단행했다. 미쓰비시조선,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광업, 미쓰비시은행 등이 설립됐다. 이들 회사들이 분리, 통합 과정을 거쳐 미쓰비시전기, 미쓰비시화성공업 등이 출범했다.
이들 중 그룹의 중핵 역할을 맡게된 회사가 미쓰비시중공업이다. 미쓰비시조선과 미쓰비시항공기가 1934년에 합병해 탄생했다. ‘중공업’이란 용어도 일본에서 고야타가 처음 만들었다. 그는 철강, 비철금속가공, 화학공업, 기계제조 등 대규모 설비로 무거운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을 뜻하는 영어의 ‘heavy industry’를 ‘중공업’으로 표기했다.
군수산업도 미쓰비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항공모함과 함상 전투기가 주요 생산 병기였다. 미쓰비시합자회사는 1943년 주식회사 미쓰비시본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 재벌 해체 후 재결합, 조직의 미쓰비시로 재편 ##
일본 재계에서 미쓰비시그룹은 ‘조직의 미쓰비시’로 불린다. 그만큼 강한 단결력을 자랑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쓰비시그룹은 유엔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의 재벌해체 조치로 토막토막 분리됐다. 미쓰비시, 미쓰이, 야스다, 스미토모 등 4대 재벌이 대상이다. 미쓰비시그룹의 경우 업종별로 쪼개졌다. 새로 설립된 회사 수는 100여개를 넘었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 GHQ의 재벌 해체 정책이 바뀌게 됐다. 1949년 중국의 탄생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 배경이다. 미국은 중국에서 공산 정권이 출범하고, 한국 전쟁이 터지자 ‘일본을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약화시키는 조치가 동아시아 지역에 혼란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경제의 민주화 정책의 변경을 가져온 배경이다. 1952년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를 기점으로 구 재벌계 기업의 재통합 작업이 시작됐다.
미쓰비시는 쪼개졌던 미쓰비시상사 관련 회사들을 잇따라 합병, 그룹 통합 작업에 나섰다. 상사들은 1953년 4개사로 합쳐진 뒤 이듬해 미쓰비시상사가 부활했다. 신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일본중공업, 미쓰비시조선은 1964년 합병해 다시 미쓰비시중공업이 됐다. 같은 해 미쓰비시제강과 미쓰비시강재도 합병, 미쓰비시제강으로 다시 출범했다.미쓰비시중공업의 재탄생은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미국의 주요 경제지들은 대서특필했다. 새로 통합된 미쓰비시그룹은 강한 단결력을 과시하며 21세기 들어서도 강력한 기업집단으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최인한 한경닷컴 이사(일본경제연구소장) janus@hankyung.com
재벌은 일본경제 발전 역사, 후계 경영자들의 역량이 그룹 흥망성쇠 결정
미쓰비시그룹, 시대 흐름 타고 거대 기업 성장 '강한 조직력과 단결력' 자랑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 ‘재벌’(財閥)의 원조는 일본이다. ‘재벌’이란 용어는 메이지시대 중반 야마나시현 출신의 사업가들이 단결해 업계에서 선풍을 일으키자 일본 언론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재벌’은 “같은 현(한국의 도에 해당) 출신의 기업가 집단”을 의미했다. 메이지시대 중기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이 ‘재벌’로 불렸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이들 경제집단을 가르키는 말로 ‘재벌’ 용어가 정착됐다. 일본경제사 연구가인 모리카와 히데마사는 재벌에 대해 “부호의 가족, 동족의 폐쇄적인 소유, 지배 아래 성립된 다목적 사업체”로 정의했다.
요즘도 일본에서는 동족적인 다각적 사업체들 가운데 지방에 정착해 지방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기업집단을 ‘지방 재벌’로 지칭하고 있다. 단행본 ‘일본의 재벌<요센(洋泉)사>의 내용을 소개한다.## 근대 일본을 만든 재벌, 그들은 누구인가 ##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세계인들이 놀랄 정도의 빠른 스피드로 근대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파란만장한 시대를 대담한 행동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살았던 기업가들이다.
당대에 기업을 일으켜 거대 재벌그룹으로 성장한 미쓰비시와 야스다, 에도시대부터 거대 상인 가문에서 발전한 미쓰이, 스미토모. 흔히 4대 재벌로 불리는 이들 전통 기업으로부터 시멘트 목재 광산 증권 등에 특화해 급성장한 신흥 재벌, 그리고 도요타자동차 등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있다. 일찍부터 일본에선 ‘4대 재벌’로 불리는 재벌이 존재했다.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야스다를 지칭한다. 메이지유신 후 급성장해 일본 경제를 키운 이들 기업은 어떻게 형성됐고 성장해 왔을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의 길을 걸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일본 경제의 성공을 이끈 거대 재벌의 창업과 성공, 장수 비결을 찾아본다. 메이지유신과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고도 경제 성장기, 장기 침체기 등을 거치며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장수하고 있는 일본 재벌들의 성장과 생존, 쇠퇴 등 흥망성쇠는 치열한 글로벌 생존 경쟁 속에 활로를 찾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 일본 재벌의 탄생과 종류 ##
재벌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메이지유신 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과 산업융성’을 국시로 내걸었다. ‘미국과 유럽을 쫓고, 미국과 유럽을 추월하자’를 슬로건으로 삼아 근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일본 정부는 각종 산업은 물론 금융, 정보, 인프라 정비도 서둘렀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타고 부를 쌓아 일본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주역이 바로 재벌들이다. 재벌은 ‘성립 방식’과 ‘업종 특징’에 따라 3개 군으로 분류된다. 먼저 성립 방식으로 세 종류로 구분한다.(1) 에도시대의 거상으로서 지위를 유지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따라 발전한 기업들이다. 미쓰이, 스미토모그룹이 대표 기업이다. (2) 에도시대 말기 또는 메이지 초기에 소규모 사업으로 시작해 20~30년에 걸쳐 재벌로 성장한 그룹이 있다. 미쓰비시, 야스다, 가와사키, 후루카와, 오쿠라, 아사노 등이다. (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성장 기업들로, 군부의 진출에 호응해 성장한 형태다. 니혼산교, 니혼짓소, 니혼소다 등이 대표 그룹이다.
업종별 특징을 기준으로 3개군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1) 상업 공업 금융 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기업을 운영하는 종합 재벌이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이 대표적이다. (2) 금융업을 주력으로 하는 금융재벌들도 있다. 야스다, 야마구치, 고노이케, 노무라그룹 등이다. (3) 특정 산업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아사노(시멘트), 후루카와(구리 광산 및 금속가공), 가와사키(조선), 니혼산교 니혼짓소 니혼소다(중공업) 등이다.
일본 재벌들은 ‘원래 손을 댔던 업종’이나 ‘발전이 예상되는 업종’을 기반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기업 창립 후 사업 전개 방식은 창업자나 경영 후계자의 판단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다. 이들 후계 경영자들의 판단이 결국 오늘날 이들 그룹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다. 이들 일본의 재벌은 규모에 따라 ‘4대 재벌’ ‘10대 재벌’ ‘15대 재벌’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 일본 재벌이 거대화한 이유 ##
재벌이 거대화한 배경에는 ‘정치 상인(政商)’ ‘광산’ ‘중공업’이 자리잡고 있다. ‘정상’들은 정치권력에 밀착해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사업을 키웠다.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국가의 자금을 위탁받은 특권 기업
(2) 정부 또는 일본 왕실의 대리 상인
(3) 정부로부터 비호를 받은 기업
첫 번째를 대표하는 기업이 ‘미쓰이’이다. 미쓰이는 미노무라 리자에몬 시절 ‘신화폐 교환 업무 대행’을 맡았다. 메이지 정부의 화폐 정책의 일익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룹을 키웠다.
두 번째를 대표하는 기업은 오쿠라. 창업자인 오쿠라 기하치로는 대만 출병과 청일전쟁 등에서 병력과 군수 물자의 수송을 맡아 커다란 부를 축적했다. 세 번째를 대표하는 기업이 미쓰비시다. 대만 출병에서 존재감을 발휘해 정부의 신뢰를 얻은 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운업을 독점했다.
하지만 모든 일본 재벌들이 ‘정치 상인’을 배경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창업자가 정치상인이라고 해도 후계자가 ‘정치 상인’에서 탈피해 회사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정치상인에서 출발한 재벌들도 광산을 소유하거나 공업화 시대의 파도를 타고 급성장했다.
<< 한국 재벌의 원조, 일본 재벌은 이렇게 해체됐다 >>
돈이 넘쳐나는 재벌이라고 해서 결코 평안하고 무사한 시기만 보낸 건 아니다. 시대 변화를 쫓지 못해 충격을 받고 사라진 재벌도 많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 재벌에 대한 첫 번째 충격파가 왔다.
전쟁 기간 중 일본 기업들은 전쟁 특수를 맘껏 누렸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자 특수로 누렸던 생산제품들이 대량으로 남아돌게 됐다. 당연히 생산에 투입됐던 자금 회수가 어려워졌다. 많은 재벌들이 경영난을 겪었다. 전쟁 특수의 반작용으로 대다수 일본 기업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구하라(久原)재벌은 ‘구하라상사’의 도산으로 기업 해체에 몰렸다. 후루카와상사의 경영 파탄은 후루카와재벌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1927년 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다.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사태의 발단은 간토대지진의 ‘어음 정리 법안’ 심의중에 시작됐다. 국회에서 대장상(기획재정부장관)의 은행파탄 관련 실언이 단초가 됐다. 많은 시민들이 예금을 찾으려고 은행으로 몰려들어 은행들이 연쇄 파산했다.
공황 상황에서 ‘스즈키상점’도 도산했다. 스즈키상점은 한때 미쓰이, 미쓰비시에 필적했던 재벌이었다. 전후 공황기의 경영 위기를 극복한 재벌들은 승자군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에 의해 재벌이 공식 해체될 때까지 생존했다.
금융공황 종료 후 재벌들 사이에선 ‘재벌 전향’ 형태로 개혁 작업이 진행됐다. 재벌들에 부가 집중된 결과 사회적으로 고조된 ‘재벌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재벌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신흥 기업진단들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 ‘신흥 재벌’로 불리는 기업이다. 독립된 기업의 주식을 모회사가 소유해 다른 회사를 지배하는 형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대약진해 군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아이카와재벌(닛산기업연합), 닛치쓰기업연합, 닛소기업연합 등은 중공업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존 재벌과 신흥 재벌들은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을 경제, 기술, 물자 공급 등으로 적극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자 연합군은 동양의 작은 나라인 일본이 어떻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에 집중했다. 특히 전쟁 자금원이 어디인지에 관심을 가졌다. 연합군 측은 “돈 많은 자산가층에 부가 집중됐고, 그들이 전쟁 수행에 협력했기 때문”으로 결론을 내렸다.
종전 후 일본의 재벌 해체가 강행된 배경이다. 재벌을 완전히 없애 일본 경제를 민주화하고, 부의 일극 집중을 막아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경제적 측면에서 저지하기 위해 재벌 해체가 진행됐다는 게 일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창업자 일족들이 일본 재벌의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 본사가 직계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이들 직계회사들이 자회사와 ‘손자회사’들을 거느리는 구조다. 이런 구조로 인해 최정상의 창업자 일족에 부가 집중되고, 배타성이 생기게 된다.
연합군의 재벌 해체 방침에 따라 재벌 본사가 독점했던 주식은 자본시장으로 흩어지게 된다. 재벌 본사가 산하 기업을 강력하게 지배하던 일본의 재벌구조도 붕괴됐다. 재벌 관련 기업들도 ‘과도 경제력 집중 배제법’에 따라 분화돼 규모가 축소됐다. 일본 재벌이 해체되는 과정이다.
<< 메이지유신 혼란기에 탄생한 일본 재벌의 원조, 미쓰비시그룹 >>
1800년대 중반 도쿠가와 막부 말기 동란기를 극복한 인물. 하층 무사에서 맨손으로 재벌로 일어선 이와사키 야타로. 정치상인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이와사키가 내다본 미쓰미시재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미쓰비시그룹의 탄생과 성장 ##
미쓰비시재벌의 성장 주역은 이와사키 야타로다. 야타로는 도사번(현 고치현)의 하층 무사 출신이다. 번의 실력자인 요시다 토요에서 배운 인연을 계기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1867년 ‘가이세이칸 나가사키상회’의 책임자로 발탁됐다.
가이세이칸 나가사키상회는 번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번 직영 상사였다. 나가사키와 오사카에 거점을 뒀다. 나가사키에 부임한 야타로는 천부적인 상인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도사번의 특산품 수출과 서양 국가들로부터 함선, 무기 수입에 분주했다. 1868년 나가사키상회의 폐쇄 결정에 따라 오사카상회로 옮겨 도사번을 위한 무역 업무에 매진했다.
1870년 오사카상회는 이름을 ‘99상회’로 바꿨다. 야타로는 오사카에서 번으로부터 매입한 3척의 배를 기반으로 해운업을 시작했다. 초기엔 도쿄~오사카, 고베~고치 간 화물 수송에 주력해 사업을 키웠다. 오사카 상인과 외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물품 매매도 했다.
메이지 정부의 번 폐지 조치로 ‘도사번’이 없어진 뒤 1873년 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개명했다. 야타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오너로 미쓰비시를 이끌게 됐다. 미쓰비시는 1874는 본사를 도쿄로 옮기면서 도약기를 맞았다. 메이지 중앙정부의 대만 출병이 회사 성장의 회사 도약의 계기가 됐다. 미쓰비시는 정부를 대신해 정잰 전략 물자 수송을 맡아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 1875년 ‘일본국 우편증기선회사’ 가 해체되면서 소유 선박은 미쓰비시로 넘어갔다.
야타로는 본사의 도쿄 이전에 맞춰 정부와의 업무 협조를 공고히하기 위해 회사 조직을 개편했다. 미쓰비시는 일본군의 조선 출병, 내전 등에도 병력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 정부의 항로 개척에도 앞장섰다. 미쓰비시가 일본의 해운을 독점하게 되는 배경이다.
야타로는 회사 운영에서 철저한 1인 독재 경영 체제를 만들었다. 1875년 제정한 사내 규정의 제 1조에는 “회사 경영의 모든 결정, 상벌 등은 사장의 독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1878년의 새 사내 규정도 ‘사장 독재’를 명기했다.
경영인으로서 야타로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그는 맹렬한 ‘1인 사장’이었으나 인재를 발탁하는 혜안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친 동생으로 미쓰비시의 2대 사장에 오른 야노스케도 비슷했다. 그는 매사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경영인이었으나 사원들을 사랑하는 온후하고 냉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야타로 초대 사장이 경영에서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이 ‘인재 등용’이었다. 그는 서양문명 도입에 열심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 심취했다. 서양 학문을 배운 학생이나 외국인을 적극 채용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초대 사장인 야타로는 미쓰비시가 근대적 기업으로 진화하는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미쓰비시는 1878년 이후 보험, 광산, 은행, 부동산 등 각종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와중에 야타로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885년 ‘우편기선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해 ‘일본우선회사’가 됐다. 미쓰비시재벌 본류 기업의 탄생을 알렸다.
## 미쓰비시: 시대 흐름을 타고 거대 기업으로 성장, 강한 조직력과 단결력 ##
일본우선회사의 설립으로 미쓰비시의 주요 사업군에서 해운업이 사라졌다. 미쓰비시의 2대 사장인 이와사키 야노스케(야타로의 친 동생)는 새로운 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회사명도 ‘미쓰비시사’로 바꿨다. 신규 사업의 주력은 다카시마탄광과 나가사키조선소였다. 다카시마탄광을 신사업의 핵심으로 삼은 야노스케는 막대한 자금을 탄광에 투자했다. 굴삭 기술의 강화와 굴삭량 증가에 힘을 쏟았다. 다카시마탄광은 품질과 생산량에서 일본 최고 광산으로 성장했다.
나가사키조선소는 메이지정부가 만든 조선소였다. 일본 정부는 1884년 민간에게 조선소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1887년 야노스케가 대장상(기획재정부장관 해당)인 마쓰카타 마사요시에게 인수를 신청해 미쓰비시의 소유가 됐다. 야노스케는 조선소에 거액을 투자해 미쓰비시조선이 세계적인 조선업체로 성장하는 초석을 놓았다.
미쓰비시는 1893년 상법 시행에 따라 합자회사로 바뀌었다. 야노스케는 이를 계기로 사장 자리를 히키야(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아들)에게 물려줬다. 3대 사장의 탄생이다. 미쓰비시는 히키야의 경영 아래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가장 돈벌이가 되는 사업은 광산업이었다. 1902년께 전국 각지에 광산과 탄광을 소유해 막대한 양의 금속과 석탄을 채굴했다.
조선업도 순조롭게 성장했다. 1899년 해군이 군함 건조를 민간에 발주하기 시작했다. 조선업계 선두인 미쓰비시는 큰 수혜을 입었다. 미쓰비시는 1905년 고베조선소를 설립했다. 최첨단 조선기술을 집적한 조선소였다. 일본 최고 조선소의 탄생이다.
## 중핵은 중공업, 세계 굴지의 신병기도 생산 ##
미쓰비시합자회사는 은행부, 영업부, 광업부 등의 사업부제를 채택했다. 독립채산제로 각 사업부가 일정 한도의 자본금을 설정했다. 사업부 책임자가 자본금 한도 내에서 책임 결재하고 경영을 하는 형태다. 이들 사업부를 분리, 독립시켜 미쓰비시를 거대 그룹으로 만든 주역이 4대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이다. 고야타는 2대 사장인 야노스케의 장남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미쓰비시합자회사 부사장을 거쳐 1916년 4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사장 취임 이듬해부터 각 사업부의 분리, 독립 작업을 단행했다. 미쓰비시조선,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광업, 미쓰비시은행 등이 설립됐다. 이들 회사들이 분리, 통합 과정을 거쳐 미쓰비시전기, 미쓰비시화성공업 등이 출범했다.
이들 중 그룹의 중핵 역할을 맡게된 회사가 미쓰비시중공업이다. 미쓰비시조선과 미쓰비시항공기가 1934년에 합병해 탄생했다. ‘중공업’이란 용어도 일본에서 고야타가 처음 만들었다. 그는 철강, 비철금속가공, 화학공업, 기계제조 등 대규모 설비로 무거운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을 뜻하는 영어의 ‘heavy industry’를 ‘중공업’으로 표기했다.
군수산업도 미쓰비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항공모함과 함상 전투기가 주요 생산 병기였다. 미쓰비시합자회사는 1943년 주식회사 미쓰비시본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 재벌 해체 후 재결합, 조직의 미쓰비시로 재편 ##
일본 재계에서 미쓰비시그룹은 ‘조직의 미쓰비시’로 불린다. 그만큼 강한 단결력을 자랑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쓰비시그룹은 유엔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의 재벌해체 조치로 토막토막 분리됐다. 미쓰비시, 미쓰이, 야스다, 스미토모 등 4대 재벌이 대상이다. 미쓰비시그룹의 경우 업종별로 쪼개졌다. 새로 설립된 회사 수는 100여개를 넘었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 GHQ의 재벌 해체 정책이 바뀌게 됐다. 1949년 중국의 탄생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 배경이다. 미국은 중국에서 공산 정권이 출범하고, 한국 전쟁이 터지자 ‘일본을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약화시키는 조치가 동아시아 지역에 혼란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경제의 민주화 정책의 변경을 가져온 배경이다. 1952년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를 기점으로 구 재벌계 기업의 재통합 작업이 시작됐다.
미쓰비시는 쪼개졌던 미쓰비시상사 관련 회사들을 잇따라 합병, 그룹 통합 작업에 나섰다. 상사들은 1953년 4개사로 합쳐진 뒤 이듬해 미쓰비시상사가 부활했다. 신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일본중공업, 미쓰비시조선은 1964년 합병해 다시 미쓰비시중공업이 됐다. 같은 해 미쓰비시제강과 미쓰비시강재도 합병, 미쓰비시제강으로 다시 출범했다.미쓰비시중공업의 재탄생은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미국의 주요 경제지들은 대서특필했다. 새로 통합된 미쓰비시그룹은 강한 단결력을 과시하며 21세기 들어서도 강력한 기업집단으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최인한 한경닷컴 이사(일본경제연구소장)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