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빛의 패션야사] 러닝화의 시초는 못 박힌 가죽신발이었다?

다이아 정채연의 뉴발란스 비욘드 런 화보. (자료 = 뉴발란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습니다. 주말마다 곳곳에선 스포츠 브랜드들이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립니다.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달리는 건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달리기를 할 때 발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덜 가도록 신는 것이 바로 러닝화입니다. 생활 속 운동을 즐기는 애슬레저족이 증가하면서 러닝화는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러닝화가 사실 구두 형태의 가죽 신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현재의 러닝화의 역사는 1800년대 선수용 신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볼튼의 육상선수였던 조셉 포스터는 기록 향상을 위해 못이 박힌 러닝화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시중엔 그가 찾는 제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파이크 크리켓화'를 러닝화에 적용했습니다.크리켓화처럼 러닝화에도 스파이크를 접목시키면 접지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해서죠. 스파이크 크리켓화는 할아버지인 사무엘 포스터와 유명한 크리켓 선수 사무엘 비둘프가 구상했다고 합니다.

조셉 포스터는 크리켓화의 스파이크를 1인치 미만으로 바꾸고, 기존 9개였던 스파이크를 6개로 줄여 무게를 최소화해 1895년 최초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제품은 '포스터 러닝 펌프'라고 불렀죠.
1924년 나왔던 리복의 스파이크 러닝화. (자료 = 리복)
러닝 펌프는 1900년대 들어 '포스터 디럭스 스파이크'로 재출시됐습니다. 이후 50년간 최고의 러닝화로 자리를 잡았죠.1924년 파리 올림픽에선 리복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은 에릭 리델, 해럴드 아브라함이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들이 금메달을 딴 스토리는 '불의 전차'라는 영화(1981년)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당시 신었던 스파이크 러닝화까지 화면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러닝화는 선수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야외활동을 즐겼습니다. 고무로 된 깔창에 끈없이 면으로 둘러진 신발이 1870년대의 운동화였습니다.

스파이크 런닝화가 일상에 파고들 틈은 없었던 셈이죠. 자전거를 타는 데 스파이크 런닝화라니..생각만 해도 발가락이 움츠러드네요. 런닝화가 스파이크를 떼고 지금의 모습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입니다. 런닝화와 같은 전문운동화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런닝화를 전문으로 생산한 미국의 스패들링(A.G.Spadling)은 1909년 마라톤화, 허들화 등에 고무 밑창을 적용했습니다. 이 시기 미국에선 각종 스포츠 브랜드가 설립됐습니다. 뉴발란스, 컨버스, 브룩스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이들 브랜드는 1950년대 운동화 대중화 시대를 이끌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국민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스포츠 등 여가활동에 대한 수요가 늘었습니다. 이에 당시 아이들은 등교용과 체육시간용으로 2가지 운동화를 갖추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여기에 1960년대 미국 전역에서 불었던 조깅 열풍도 한몫을 했습니다. 이에 런닝화를 비롯한 운동화 시장은 급격하게 커지게 됐습니다.

1962년 뉴요커지는 운동화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1951년 3500만족 팔렸던 운동화 판매량이 61년엔 1억3000만족으로 5배 가량 늘었을 정도였습니다.

운동화 시장이 커지면서 이때부터 러닝화 기능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1970년대 들어 일본 아식스를 비롯해 아디다스 리복 브룩스 등도 충격흡수기능을 강화했습니다. 와플 모양을 본 따 네모난 스파이크 무늬 밑창이 나이키에 적용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기능성 강화 경쟁을 벌인 덕분에 현재와 같은 다양한 러닝화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븐 소재로 만든 초경량 우븐런닝화나 통풍을 강화한 메시 소재까지 기능은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도심 아스팔트를 걸어다닐 때나 등산을 할 때도 러닝화의 활용도가 높아진 이유겠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드는 가을의 문턱. 찬바람이 불어닥치기 전에 조만간 러닝화를 신고 한강변을 달려봐야겠습니다.

고은빛 한경닷컴 기자 silverligh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