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동부 회장, '동부 부흥' 꿈 못 이루고… 창업에서 퇴장까지 '48년 여정' 막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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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동부 회장 퇴진21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현존하는 재벌 총수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남은 창업 1세대 기업인이다. 그만큼 자존심이 세고 자부심이 컸다. 퇴장하는 길은 명예롭지 않았다. 그룹 측은 김 회장이 이번 성추문 파문으로 힘들게 일군 기업인으로서의 명예를 잃게 된 점을 가장 아쉬워하고 있다.
만 24세 나이로 창업
건설·금융 등 업종 넓혀 한때 재계 10위로 키워
2013년 유동성 위기로 흔들
하이텍·화재 실적 호조…그룹 재건 힘쓰다 퇴진
경영전략 변화에 촉각
김 회장 퇴진으로 당장 동부그룹 지배구조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동부그룹은 김 회장 아들인 김남호 동부화재 상무가 독자적 경영능력을 인정받을 때까지 이근영 회장 중심의 과도체제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동부그룹 어디로 가나
동부그룹 지배구조는 동부화재가 동부증권과 동부생명 등 금융 계열사를, (주)동부가 동부메탈과 동부하이텍 등 비금융(제조) 계열사를 이끄는 쌍두마차 체제다. 김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는 동부화재 지분 23.26%, (주)동부 지분 48.46%를 통해 그룹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창업주인 김 회장보다 김 상무 지분이 더 많다. 김 상무는 1991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지분을 증여받아 동부화재 9.01%, (주)동부 18.59%를 가진 개인 최대주주다. 이 때문에 당분간 김 회장이 본인 지분을 김 상무에게 급하게 넘겨줄 이유가 없다는 게 그룹 측 설명이다.김 회장이 물러나면서 산업은행 총재와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낸 이근영 동부화재 고문을 회장으로 영입한 것도 아직 김 상무가 경영 전면에 나설 여건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상무는 1975년생으로 올해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외국계 컨설팅회사 AT커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2009년 동부제철에 입사, 팜한농을 거쳐 동부화재 산하 동부금융연구소에서 금융전략실장을 맡고 있다. 재계는 앞으로 김 상무가 얼마나 경영 보폭을 넓혀 나갈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김 회장의 퇴진으로 상대적으로 금융계열사에 더 힘이 실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동부화재가 지난해 7261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등 금융계열사가 선전하고 있는 데 비해 비금융 계열사는 동부하이텍을 제외하고는 실적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새로 그룹을 이끌게 된 이 회장도 금융통으로 제조업 관련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다.
◆동부하이텍 반석에 올렸지만…
이날 퇴진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동성에 빠진 동부그룹의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 회장의 노력도 빛이 바래게 됐다. 동부그룹의 재계 순위는 2000년 10위까지 올랐으나 워크아웃과 계열사 매각을 거치며 2015년 20위, 지난해는 36위까지 떨어졌다.1969년 24세에 자본금 2500만원으로 미륭건설을 창업한 김 회장은 내년 1월이면 창업 49주년을 맞는다. 1970년대 중동 건설 경기 호황을 발판으로 사업을 키워 금융, 보험, 석유화학, 전자까지 차례로 업종을 넓혔다. 1세대 창업자답게 강한 도전정신과 추진력으로 비메모리사업에 뛰어들어 동부하이텍의 흑자 기반을 마련했다. 이 회사가 업황 악화와 기술력 부족으로 수년간 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는 주변의 만류에도 30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보였다.
2013년 동양그룹 사태로 시중에 유동성이 마른 가운데 건설과 철강 등 주력 사업이 어려움에 빠지며 그룹 전체가 시련기를 맞았다. 2014년 말 법정관리에 들어간 동부건설은 2015년 10월 계열분리됐고, 동부제철도 오너 일가 지분을 100 대 1로 감자한 끝에 최대주주 자리를 산업은행에 넘겼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평소 임직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던 모습을 이제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