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바이러스 입체로 보는 고해상도 현미경을 만들다

노벨화학상 뒤보셰 명예교수 등 3명
올해 노벨 화학상은 세포와 바이러스를 살아있는 상태에서 손상 없이 관찰할 수 있는 ‘극저온전자현미경’을 개발한 유럽 출신 과학자 3명에게 돌아갔다. 이들이 개발한 현미경은 박테리아나 HIV(에이즈) 바이러스, 단백질의 구조를 살아있는 상태에 가장 가깝게 볼 수 있어 질병 치료법 개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4일(현지시간)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자크 뒤보셰 스위스 로잔대 생물물리학과 명예교수(75)와 요아킴 프랑크 미국 컬럼비아대 생화학분자생물학과 교수(77), 리처드 헨더슨 영국 의학연구위원회 분자생물학연구소 연구원(72)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노벨상위원회는 “이들이 살아있는 생체분자의 구조를 원자 수준까지 볼 수 있는 고해상도 극저온전자현미경을 개발한 공로가 인정된다”고 말했다.과학자들을 오랫동안 살아있는 세포를 가장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방법을 찾아왔다. 샘플을 확대해 보는 현미경에 이어 그보다 훨씬 작은 구조를 보는 전자현미경이 잇달아 개발됐다. 하지만 기존의 전자현미경은 전자빔이 투과하는 방식이어서 살아있는 세포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샘플을 건조시켜 봐야 했다. 하지만 세포를 건조시키면 살아있을 때와 분자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한 구조와 기능을 확인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자크 뒤보셰 스위스 로잔대 생물물리학과 명예교수
이번에 상을 받은 세 사람은 급속 동결이라는 방법에서 기회를 찾았다. 생체 분자가 변형하기 전 급속히 냉동시켜 원래 분자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이다. 마치 자기공명영상(MRI)이 사람 몸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포와 바이러스를 살아있는 상태로 보는 원리다.스위스 출신인 뒤보셰 명예교수는 1980년대 초 전자현미경 시료를 넣는 진공관에 물을 넣고 급히 얼려 생체 샘플을 살아있는 상태에 가깝게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생체 분자를 급속 냉동시키면 살아있을 때 원형을 보존하는 ‘동결 고정’ 기술을 처음 제시한 것이다. 현재는 액체 질소를 이용하면 생체세포가 불과 수 밀리초(ms) 동안 영하 196도로 급속 동결 상태가 된다.

리처드 헨더슨 영국 의학연구위원회 분자생물학연구소 연구원
영국 에든버러 출신인 헨더슨 연구원은 1970년대부터 생체 시료를 정밀 분석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극저온 상태에서 세포의 원자 구조를 분석하는 기술을 제시했다. 그는 1990년 단백질의 입체 구조를 생성하는 전자현미경 기술을 개발했다. 헨더슨 박사는 지난해 한국을 찾아 국내 연구를 살펴보기도 했다. 이현숙 서울대 교수가 그의 제자다.미국에서 활동 중인 프랑크 교수는 원래는 독일 태생이다. 그는 극저온전자현미경을 이용해 생체 분자의 입체 구조를 정밀하게 탐색하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개발한 공로가 인정됐다. 프랑크 교수는 지난 1975~1986년 전자현미경의 2차원 이미지를 분석하는 이미지 처리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입체 구조로 만드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요아킴 프랑크 미국 컬럼비아대 생화학분자생물학과 교수
세 사람의 이런 노력 덕분에 극저온전자현미경 기술이 하나 둘 완성되기 시작했다. 지난 2013년에는 생체 분자의 원자까지도 볼 수 있는 해상도에 도달했다. 현재경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세 사람이 이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는 과학자들은 생생한 포도의 모습을 보려고 해도 사실상 건포도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며 “1970년대부터 이어온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이제는 젊은 과학자들이 살아있는 상태에 가장 가까운 세포와 바이러스, 단백질 모습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극저온전자현미경 분야는 최근 10년 새 급속히 발전하면서 생명 공학 분야에서 괄목할 결과를 내고 있다. 살아있는 상태의 세포나 단백질의 분자 구조와 원자까지 살펴볼 수 있는 ‘구조 생물학’이란 새 분야까지 등장했다. 살아있는 바이러스와 세포의 분자 구조까지 알아내면 생명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신진대사 활동을 규명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항생제 내성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비롯해 지난해 유행한 지카바이러스의 표면 구조도 이 전자현미경을 통해 규명됐다.

세 사람은 상금 900만 크로나(약 12억6000만원)를 3분의 1씩 나눠 받는다. 시상식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 열린다. 노벨위원회는 2일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를 발표한 데 문학상(5일), 평화상(6일), 경제학상(9일) 등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한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